한국 도시산업선교회는 산업화 시대 노동-도시빈민 문제 해결과 노동자 인권운동에 기여했다. 한국의 산업선교회는 1950년대 말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의 주도로 탄생했지만, 더 깊은 뿌리는 1940년대 프랑스에서 시작된 가톨릭 노동자 사제 캠페인과 얽혀 있다.
프랑스 주교청은 1944년 대주교 직할 노동자사제 선교부를 설립했다. “젊은 사제들에게 세속적인 복장을 허용하고 공장에서 노동하게 함으로써 노동자들의 현실적 요구를 습득해 가톨릭 신앙으로부터 사실상 멀어진 노동계급의 신뢰를 회복”하려는 취지였다.
노동자사제 운동은 1941년 지중해 항구도시 마르세유의 부두에서 자크 로우(Jacques Loew)라는 신부에 의해 시작됐다. 그가 부여받은 임무는 직접 노동하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노동계급의 처지와 요구를 살펴보라는 거였다. 하지만 거칠고 험한 노동 현장에서 멀끔한 사제복을 입고 구경꾼으로 완수하기 불가능한 임무였다. 그를 비롯한 젊은 사제들은 점차 노동 현장에 뛰어들기 시작했고, 1945년 교황 비오 12세도 프랑스 주교청의 대담한 실험을 마지못해 승인했다.
작업복 차림의 사제들은 노동자들과 똑같이 노동하며 점차 노동운동, 즉 임금과 근로조건 개선 운동에 동참했고, 다수는 주동자로 나섰다. 1953년 90여 명의 노동자사제 중 10명이 결혼으로 교회를 떠났고 15명은 공산주의자들과 협력관계를 형성했다는 기록도 있다.
공장주들은 대주교와 교황청에 불만을 제기했고, 교황청은 53년 7월 27일 노동자사제의 ‘주일 노동’을 공식적으로 금지한 데 이어 11월 모든 노동자사제의 교회 복귀를 명령했다. 일부는 그 조치에 불응해 사제직을 포기했고, 로우 신부 역시 교회를 떠나 ‘성베드로와 바울 노동자선교단’을 설립했다.
노동자사제 정신은 60년대 가톨릭 개혁-개방의 분수령이 된 ‘바티칸 2차공의회’ 정신에 흡수됐고 국가와 지역, 교파를 넘어 세계로 확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