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반도체 업계가 조 바이든 행정부에 "중국에 대한 반도체 수출 규제를 추가하지 말아달라"는 성명을 낸 것을 두고 국내 반도체 기업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의 기조 변화에 따라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은 중국에서 공장을 확대 운영하거나 마케팅을 강화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길 수 있어서다. 하지만 첨단 기술 패권을 두고 중국과 경쟁을 벌이는 미국으로서는 금방 변화를 보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여전하다. 두 강대국 사이에서 눈치만 봐야 하는 불확실성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9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반도체 산업협회(SIA)는 성명을 통해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모호하며 일방적 규제를 반복하는 것은 미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공급망을 교란하며 중국의 지속적인 보복 확대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며 "(규제가) 동맹국들과 완전히 조율됐는지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 추가 규제를 자제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SIA는 인텔·IBM· 퀄컴·엔비디아 등 미국 기업뿐 아니라 삼성전자·SK하이닉스·TSMC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이 회원사로 있는 미국 반도체 산업 대표 단체다. SIA의 반발 배경에는 회원사들이 규제 때문에 실적 감소를 겪고 있어서다. 미 상무부는 지난해 10월 △18nm(나노미터·10억 분의 1m) 이하 D램 △ 128단 이상 낸드 플래시 △14nm 이하 로직 칩을 생산하는 중국 기업에 반도체 장비를 수출할 경우 사전에 허가를 받도록 했다. 여기에 저사양 인공지능(AI) 반도체, 클라우드 컴퓨팅 장비 등 규제 목록을 넓히려는 움직임까지 보인다.
세계 최대 반도체 장비 수입국이면서 최대 정보통신(IT) 시장이 있는 중국에 대한 수출 장벽이 세워지면서 반사 이익은 오히려 중국 현지 기업이 가져갔다. 미국 장비 회사들의 실적은 후퇴한 반면 중국의 반도체 장비회사 베이팡화창은 최근 공시를 통해 올 상반기 이익이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최대 155.8% 증가한 19억3,000만 위안(약 3,400억 원) 일 것으로 예상했다.
기업들의 요구대로 미 행정부가 반도체 규제를 다소 완화할 경우 한국 기업도 이득을 볼 수 있다. 미 장비 규제는 중국에 공장을 가동하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 기업은 1년 유예를 적용받았는데 9월 말 끝난다. 또 양사는 미국 반도체 보조금 지급을 전제로 제시된 가드레일 규제도 적용받고 있다. 미 상무부는 반도체 보조금을 받는 기업에 '10년 동안 중국 내 첨단 반도체 생산 설비의 생산 능력을 5% 이내만 확장 가능하다'고 규제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중국을 틀어막으면 미국 기업도 죽을 수밖에 없다"라며 "완강했던 미 정부의 기조가 누그러질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된 것만으로도 좋아진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당장 미국 정부가 대(對)중국 규제를 풀 것이라고 속단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그 정도 기업들의 목소리로 꺾일 것이었으면 벌써 풀렸을 것"이라며 "아직 미국 정부가 뭔가 바꿀 만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규제를 풀어도 그 혜택은 미국 기업만 누릴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은 "내년 중간 선거를 앞두고 있는 미국 정부 입장에선 실리콘밸리 반도체 기업의 후원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며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현지 기업을 중심으로 규제 완화 혜택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