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양행이 8년 넘는 노력 끝에 내놓은 국산 신약 31호 렉라자를 폐암 환자들에게 무상으로 지원하겠다는 깜짝 선언을 하자 세간의 시선에는 의심이 서렸다. 치료제가 필요한 환자를 선점해 앞으로도 같은 약을 쓰도록 하려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많았지만 "치료와 마케팅 모두 성공했다"는 업계의 격려도 있었다. 회사도 이런 오해를 예상 못 한 건 아니다. 미리 법률 검토까지 한 이유다. 공정거래규약과 약사법, 의료법 등을 살핀 결과 "문제없다"는 답을 얻고서야 렉라자 1차 치료제 조기 공급 프로그램(EAP)을 실시하기로 했다.
18일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본사에서 만난 오세웅 유한양행 중앙연구소장과 임효영 의학임상본부장은 "EAP를 한다고 회사가 큰 타격을 입는 건 아니다"라고 답했다. 이들은 치료제의 개발과 연구, 출시를 총괄했다. 회사가 이 약을 흔쾌히 주기로 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결코 성공할 거라곤 기대하지 못했을 만큼 힘든 임상 과정에 자발적으로 나선 환자들과 의료진에게 보답하겠다는 것. 둘째, 항암신약 개발이라는 소원을 이룬 만큼 회사 구성원들과 기쁨도 나누고 싶다는 것.
오 소장은 2015년 국내 신약개발 업체에서 초기 물질을 들여와 오픈이노베이션(기술·아이디어를 외부에서 받아 개발하는 것)을 시작할 때만 해도 유한양행은 '출발이 늦은 토끼'였다고 떠올렸다. 그는 "네 개의 경쟁 약물이 임상 2상 중이었는데 우리는 임상도 시작을 못 했다"며 "(우리의 초기 물질은) 다른 회사에서 거절했던 터라 늦었다는 걱정이 컸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이 물질에 회사의 명운을 건 이유는 "가능성을 봤고 우리도 신약 한번 만들어 보자는 구성원들의 의지가 강했다"고 했다.
임상을 시작하기도 전 중국 제약사와 최대 1억2,000만 달러(약 1,400억 원) 규모 기술이전 계약까지 맺으며 이런 걱정은 해소되는 듯했다. 그런데 2016년 7월 이 회사가 중도에 계약을 해지하면서 내부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오 소장은 "불과 1년 지났을 때 첫 기술이전 계약이 좌절되며 내부 동력이 떨어졌고 '2005년 이후 신약을 못 내고 있다'는 패배감마저 감돌았다"며 초기 내부 구성원들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일이 어려웠다고 떠올렸다. 그는 '신약개발은 마라톤이고 크게 될 과제는 글로벌 제약사들도 여러 번 위기를 겪는다'는 점을 강조하며 멀리 내다보자고 구성원들을 독려했다고 한다.
다행히 전임상과 초기임상(1·2상) 결과는 좋았다. 회사는 이를 바탕으로 2018년 글로벌 제약사 얀센의 자회사 얀센바이오테크에 기술 이전을 하고 계약금과 마일스톤(단계별 기술료) 등 총 12억5,500만 달러(약 1조5,882억 원)를 받기로 했다. 아직 글로벌 임상을 할 역량이 충분치 않았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오 소장은 "막판에 중국의 한 글로벌 기업이 두 배 이상 높은 금액을 불렀다"며 "논의 결과 '이 약을 제대로 개발할 수 있는 회사로 보내자'는 공감대가 생겨 얀센에 수출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임상 시작단계에서 경쟁약물인 타그리소가 미국과 유럽 등에서 급여로 등재된 건 회사엔 위기였다. 임 본부장은 중국과 대만을 오가며 연구진을 만나는 한편 팬데믹으로 하늘길이 막힌 뒤엔 화상회의로 해외 연구진들과 교류하며 환자 모집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그는 "급여용 치료제가 있는데 환자들에게 새 치료제 임상에 참여해달라는 건 설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면서 "아직 기회가 남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튀르키예, 그리스, 호주 등 연구진을 연구위원회에 초청하고 화상으로 설득했다"고 회했다.
글로벌 임상 3상은 출발부터 암초를 만났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튀르키예 지진 등 역대급 외부 변수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만들었다. 임 본부장은 "글로벌 임상 3상을 어렵게 시작했는데 2019년 연말을 지나며 코로나19가 퍼지는 바람에 거의 모든 병원을 접근조차 못했다"며 "일정에 맞춰 환자가 피검사를 하고 약을 타 가야 하는데 여의치 않았다"고 했다.
해외 사정은 더 나빴다. 임상용 약을 미국에서 만들어 다른 국가에 보내야 하는데 통관이 길어진 것. 환자들은 투약을 시작했는데 배송 문제로 약이 모자랄 위기가 왔다. 미 식품의약국(FDA) 검사관에게 "생명을 살리는 약이니 서둘러 달라"는 문서까지 보낸 결과 다행히 단 한 건도 빠짐없이 전달됐다.
전쟁도 큰 고비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많은 환자가 임상에 참여하는 나라들이다. 임 본부장은 "두 나라 상황을 거의 매일 모니터링하느라 사무실이 워룸 같았다"고 했다. 다행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물론 지진을 겪은 튀르키예 환자를 포함해 두 명 빼고는 임상을 무사히 끝냈다고 한다.
지성이면 감천인 걸까. 운도 따랐다. 예상보다 두 달 앞당긴 2021년 1월 렉라자가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다른 약을 쓰다가 특정 돌연변이가 생기면 대체하는 2차 치료제로 허가를 받은 것이다. 오 소장은 "공신력 있는 학술지에 실리면 믿을 만한 데이터로 인정받는다"며 "국제적 암 관련 학술지에 데이터를 투명하게 공개했고 두 개 학술지에 논문이 실린 뒤 유명 학술지에서 연락을 받았다"고 자랑했다. 그 무렵 경쟁 약물의 임상 결과 소식도 들려왔다. 효과가 없거나, 독성이 심해 약으로 쓸 수 없다는 것.
유한양행의 다음 목표는 국내 점유율이 아닌 글로벌 점유율을 높이는 것. 폐암신약 분야에서 게임체인저가 되려는 얀센과 손잡고 아스트라제네카(AZ)의 3세대 비소세포폐암 표적항암제 타그리소의 아성을 넘는 것이다.
임 본부장은 "글로벌 폐암신약 시장에선 타그리소의 점유율이 약 70% 이상 될 정도"라며 "제아무리 얀센이라도 독점에 가까운 시장에 렉라자로 한 번에 진입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타그리소의 글로벌 매출은 약 8조 원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선택한 우회법은 '얀센의 항체 치료제와 렉라자를 같이 썼을 때' 효과와 타그리소만 썼을 때 효과를 비교하는 것이다. 그는 "골리앗 같은 AZ가 다윗에 불과한 우리를 경쟁사로 생각해주면 너무나 고마운 일"이라며 "연말쯤에는 중요한 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회사가 EAP를 약속한 지 2주 만에 렉라자 무상공급 1, 2호 대상자가 나왔다. 상피세포성장인자수용체(EGFR) 돌연변이를 동반한 비소세포폐암 4a기로 진단된 60대 남성과 1년 전 폐선암 1기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으나 재발한 50대 여성이 고신대복음병원에서 렉라자를 무료로 처방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