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회사원 부퐁남(28)은 올해 5월 한국 아이돌 그룹 블랙핑크의 태국 콘서트를 보기 위해 방콕을 찾았다. VIP석 티켓값(950만 동·약 50만 원)에 항공권(450만 동·약 24만 원)까지 마련하느라 한 달 월급을 몽땅 쏟아부었지만 아깝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블랙핑크 팬이 몰리면서 숙박비도 평소보다 크게 올랐다”며 “예정에 없던 추가 지출로 출혈이 컸지만, 공연을 또 볼 기회가 생긴다면 기꺼이 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 직업 군인 카윰 루크만(25)은 미국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의 내년 3월 싱가포르 콘서트 티켓을 손에 넣었다. 과정은 쉽지 않았다. 이달 7일 섭씨 35도를 웃도는 무더위 속에 이틀간 판매처 앞에서 노숙을 해야 했다. 36시간 넘는 기다림 끝에 티켓을 받은 그는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동남아시아가 팝스타들의 공연 열기로 달아오르고 있다. 코로나19 확산 우려로 중단했던 월드투어가 올해 다시 시작되자 팬들은 기다렸다는 듯 앞다퉈 지갑을 열고 있다. 예상보다 더 뜨거운 관심이 쏟아지면서 콘서트가 물가상승(인플레이션) 압력을 끌어올리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18일 블룸버그통신 등을 종합하면, 테일러 스위프트의 싱가포르 콘서트는 “돈다발을 내밀어도 못 간다”는 말이 나올 만큼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다. 최근 미국에서 월드투어를 시작한 스위프트는 내년 8월까지 각 대륙의 주요 도시에서 공연을 이어간다. 동남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유일하게 싱가포르만 방문한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10개국 인구는 약 6억 명으로 중국과 인도 다음으로 많은데, 공연은 싱가포르 딱 한 곳에서 열리다 보니 티켓 구매 경쟁이 상상을 초월한다. 주최 측은 “싱가포르 콘서트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총 33만 명인데, 티켓 사전 판매 명단에 2,200만 명이 이름을 올렸다”고 발표했다. 티켓 정식 발매일(7일)에는 100만 명이 동시 접속하면서 서버가 마비됐다. 싱가포르 거주자들은 오프라인 티켓 판매처 앞에서 이틀 밤낮을 지새우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언론들은 티켓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앞다퉈 보도했다. 티켓 구매 성공자의 무용담은 물론이고 △구매 확률을 높이려 온 가족을 동원하거나 △컴퓨터를 3, 4대 준비해 대기하고 △이틀간 판매 현장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결국 티켓을 거머쥐지 못하는 등의 실패기도 기사로 쏟아냈다.
서방 언론들도 동남아의 피 튀기는 스위프트 공연 티켓 구하기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영국 가디언은 “그야말로 전쟁”이라고 소개했고,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팬들에게 더 이상 돈은 문제가 아니다. 티켓을 구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 전했다.
좋아하는 가수를 향한 ‘팬심’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문제는 코로나19 기간 억눌렸던 공연 수요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가뜩이나 고공행진하는 물가를 더욱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 싱가포르에서는 팬들이 비싼 비용에도 망설임 없이 돈을 뿌리면서 콘서트 티켓 가격뿐 아니라 공연장 주변 숙박비와 음식값 등 다양한 서비스 물가가 오르는 이른바 ‘투어플레이션(여행+인플레이션)’ 조짐이 고개를 들고 있다.
스위프트의 싱가포르 공연 티켓 가운데 가장 비싼 좌석은 1,228달러(약 155만 원) 수준인데도 순식간에 매진됐다. 티켓과 5성급 호텔을 연계한 고급 패키지 상품도 구하기 쉽지 않다. 수요가 끊이지 않다 보니 암표 역시 기승을 부린다. 싱가포르 국영 CNA방송은 “260달러(약 32만7,000원) 수준이던 티켓이 티켓 재판매 사이트에서 2,600달러(327만 원)로 10배 넘게 올라왔는데도 팔렸다”고 전했다.
숙박 가격도 천정부지로 뛰고 있다. 공연이 아직 8개월이나 남았는데, 공연장 인근 주요 호텔은 이미 꽉 찼다고 싱가포르 스트레이트타임스는 보도했다. 팬퍼시픽 호텔 그룹의 신탄 최고 상업·마케팅 책임자는 “공연 기간(내년 3월 2~9일) 그룹 산하 프리미엄 호텔 브랜드 숙박이 티켓 오픈 전 대비 200% 증가했다”고 밝혔다.
올해 1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블랙핑크 콘서트 티켓 역시 재판매 사이트에서 당초 티켓 가격(400달러)보다 8배나 비싼 값에 팔린 바 있다. 미국 경제 매체 CNBC방송은 “콘서트가 인플레이션의 잠재적 원인이 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콘서트가 부실 대출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경고마저 나온다. 인도네시아 금융청은 5월 기준 디지털 플랫폼 대출 잔액이 51조5,000억 루피아(약 4조3,466억 원)로 1년 전보다 28% 급증했다고 밝혔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브리핑에서 “최근에는 콘서트 티켓을 구매하기 위해 대출을 받기도 한다”며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돈을 빌리지 말라”고 강조했다.
블룸버그는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유명 가수들의 콘서트가 이어지면서 빠른 자금 조달을 위해 핀테크(기술+금융) 대출로 눈을 돌리는 젊은 인도네시아인들이 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올해 상반기 블랙핑크(3월)와 콜드플레이(11월) 자카르타 콘서트 티켓 예매로 소란했는데, 개인 간 거래(P2P) 플랫폼을 이용해 대출을 받아 티켓을 산 경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