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강을 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드라마 '닥터 차정숙'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것이었다. 지난 학기 워낙 화제였던 데다가 꽤 많은 학생들이 ‘엄마와 함께 본 드라마’로 꼽은 덕에 챙겨 보려고 했지만 짬이 나지 않았다. 결국 드라마가 끝나고 학기도 끝난 후에야 몰아볼 수 있는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주인공 차정숙(엄정화 분)은 의과대학 재학 당시 같은 과 동기였던 서인호(김병철 분)와의 사이에서 임신을 한 뒤 결혼과 출산을 거쳐 전업주부로 살아온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급성간염으로 간이식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도 남편은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며 간이식을 해 주지 않는다. 다행히 타인의 간을 이식받은 차정숙은 건강은 되찾았지만 허한 마음은 하루에 1,000만 원어치의 쇼핑을 해도 달래지지 않는다. 어머니 오덕례가 ‘네가 제일 잘하는 것은 공부’라고 일러주자 잊고 있던 옛 꿈이 되살아난 차정숙은 20여 년 전 그만 둔 레지던트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시험을 쳐서 합격하고 남편이 일하고 있는 대학병원에서 일을 시작한다. 드라마는 차정숙이 다시 일하게 되면서 겪는 직장과 가족 안팎의 사건을 진지하지만 무겁지 않게 그려낸다.
전업주부였던 차정숙을 ‘닥터 차정숙’이라고 재호명하는 것은 그녀의 남편을 ‘닥터 서인호’라고 부르는 것과 전혀 다른 효과를 갖는다. 아내와 어머니라는 위치는 여전히 사회적 직업과 충돌한다. 이 드라마는 ‘경단녀’인 의사 차정숙이 겪는 사건들과 주위 인물들을 통해 우리 시대 아내와 어머니라는 위치, 특히 모성을 둘러싼 심대한 변화와 혼란의 와중을 드러낸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드라마에는 세대와 계층, 상황이 다양한 어머니들이 등장한다. 차정숙의 시어머니인 곽애심(박준금 분)과 차정숙의 어머니인 오덕례(김미경 분)는 60, 70대 어머니를 대표한다. 서인호의 어머니이기도 한 곽애심은 며느리의 가족에 대한 헌신과 노동을 당연히 여긴다. 또 양심상 아내에게 간이식을 하려고 하는 아들을 말려 결국 간이식을 못 하게 한다. ‘시월드’의 대표주자로 모자람이 없는 인물인 것이다. 한편 오덕례는 가족을 소홀히 하는 사위 서인호를 못마땅해하는 딸에게 “네가 큰 사람이니 품어 주면서 살면 나중에는 알아줄 날이 있을 것”이라며 달랜다. 아들의 어머니나 딸의 어머니 모두 ‘남존여비(男尊女卑)’에서 자유롭지 못 한 세대. 1950년대에 태어나 1960, 70년대에 성인이 된 어머니들의 세계는 그랬다.
‘자궁가족(uterine family)’이라는 개념이 있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인류학자 마저리 울프(Margey Wolf)는 유교 전통을 간직한 대만 농촌 사회에서 혼인 초기 여성들의 자살률이 유난히 높은 이유에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혼인 초기를 넘기고 자식, 특히 아들을 낳은 여성이 어떻게 자신의 핏줄을 남편의 집안에 더해가면서 세력권을 구축하는지를 추적했다. 여성들은 자신의 자녀와 며느리를 중심으로 비공식적 가족을 구축해 어머니로서의 권력을 행사한다. 울프는 이를 1975년 출판한 저서 'Women and the Family in Rural Taiwan'에서 공식적인 부계 가족과 대비되는 비공식적 ‘자궁가족’이라고 명명했다. 자궁가족 문화에서 여성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들의 어머니이자 집안의 큰 어른으로 대접을 받게 되며, 죽어서는 남편과 함께 제사상을 받게 된다. 노후의 보상으로 성차별을 수용하는 것이다. 이 개념은 이후 대만과 중국뿐 아니라 유교 전통을 지닌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발견되는, 성차별적 어머니를 설명하는 주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남아선호는 가부장적 부계 가족의 공식 이데올로기였을 뿐 아니라 이 가족 내에서 가장 비천한 자리에 놓인 젊은 며느리들의 생존전략이기도 했다. 그 생존전략이 통하지 않는 어떤 상황에 놓인 여성들은 드라마에서 로이킴(민우혁 분)의 어머니와 같이 자식을 입양시키거나 버리거나 자살했을 것이다. 혹은 이를 함께 실행했을 것이다.
60, 70대 어머니들에게 당황스러운 사실은 적어도 조선조부터 시작되어 유지, 발전한 이 체제가 지금은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의 딸들은, 그리고 며느리들은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고등교육을 받고, 직업을 갖고 자신의 일을 하며, 어머니와는 다른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한 세대다. 드라마에서 95학번으로 등장하는 차정숙과 최승희(명세빈 분), 백미희(백주희 분)가 이 세대다. 이들이 이전 세대 여성들과 다른 생애를 꿈꾸고 살 수 있었던 건 부분적으로는 어머니들의 지원과 응원에 힘입은 바 크다. 본격적인 산업화 시대 어머니가 된 60, 70대 어머니들은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는 가족계획의 슬로건 아래 임신을 조절하고 (물론 남아선호는 여전해서 여아낙태가 기승을 부렸던 시대이기도 하다) 공부 잘하는 딸은 자신과 다른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에 더하여 민주화, 탈냉전, 자유화의 영향으로 여성들에게 아주 조금씩 가능성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1987년 남녀고용평등법(현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생활의 양립지원을 위한 법률)이 제정되었고, 1993년 삼성이 대졸 여성 공채를 국내 최초로 도입했다. 더불어 여학생들의 대학 진학률도 계속 상승했다. (여학생 대학 진학률은 1970년 24.2%에서 1995년 49.5%로 증가했으며 2009년부터 남학생 대학 진학률을 능가했다. 2022년에는 73.8%였다.) 그러나 여성 노동참가율은 함께 높아지지 않았다. 1995년 48.4%에서 2022년 54.6%로 증가했지만 대학 진학률의 드라마틱한 상승률에 비교해보면 그다지 크지 않다. 남성보다 15% 이상 낮기도 하다. 여성 개개인에게 짐 지워진 출산과 양육의 부담 그로 인한 경력단절이 그 이유라는 것은 두말하면 입만 아프다. ‘경단녀’ 차정숙은 이런 상황에 놓인 전형적 인물이다.
그럼에도 여러 조건들의 결합과 자신들의 의지적인 실천으로 이 세대 여성들의 어머니 되기는 그들의 어머니보다는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주인공 차정숙의 라이벌인 최승희는 서인호의 첫사랑으로 이후 서인호의 딸을 낳아 혼자 기른 가정의학과 전문의다. 이제까지의 한국 드라마에서 ‘불륜녀’로 곧잘 등장한 인물이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싱글맘으로서의 정체성이 두드러진다는 점이 흥미롭다. 또한 존재감은 미미하지만 비혼으로 자신의 병원을 경영하는 백미희 또한 차정숙과 그녀의 딸을 돌보는 이로 등장해 다양한 상호 돌봄의 관계를 보여준다.
40, 50대 어머니와 함께 이 드라마를 보았다는 학생들이 들려준 어머니들의 사연은 다양하지만 공통점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우리 엄마는 아빠 못지않게 혹은 아빠보다 더 똑똑하고 일도 잘하는데 여러 사정으로 경력이 단절되었거나 혹은 조건이 좋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의 결론은 당연히, 결혼과 어머니 되기에 대해 신중하게 고민하겠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젊은 여성들의 어머니 되기에 대한 생각과 실행은 다양하다. 남편의 외도로 고통받으면서도 이혼하지 못 했던 어머니에 대한 양가감정으로 남성과의 정서적 관계를 도외시하는 이도 있고 자신의 병을 악화시키는 임신을 유지하며 아이를 살리고자 하는 이도 있다. 할머니에게 외도한 아버지 양육의 책임을 따져묻기도 하고, 어머니의 이혼 결정을 지지하기도 한다.
여성과 남성 생애 전망의 변화, 연애와 성, 결혼을 둘러싼 변동과 혼란, 가족관계의 이합집산으로 여성들은 어머니 되기를 더 고민할 것이고 더 다양한 방식으로 창조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논의되기 시작한 ‘유령 아동’(미신고 영아) 문제 또한 친모에 대한 일방적 비난과 강력한 처벌적 법제화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일단 어머니 되기의 고민과 상황을 기꺼이 들을 수는 없는 걸까?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찾아가는 차정숙의 산뜻한 결말과 대비되는 현실 앞에서 되뇌게 되는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