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의 삶을 짧게 요약하는 건 힘든 걸 떠나서 도리에도 어긋나는 짓인 듯해서 외면하게 된다. 미국 흑인 인권운동가 출신 정치인 존 루이스(1940.2.21~2020.7.17)가 그런 경우다. 그는 1960년대 이래 거의 모든 흑인 민권-인권 운동 현장의 역사를 상흔과 주름으로 몸에 새긴 인물이었다. 만 20세 때인 1960년 2월 테네시주 내슈빌 백인 전용식당에서 처음 체포된 이래 40여 차례 체포-연행-구금됐고, 수도 없이 다쳤고, 셀마-몽고메리 행진 땐 백인 경찰에게 맞아 두개골 골절로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맨 적도 있었다.
비폭력주의자였던 그는 블랙 파워를 표방한 스토클리 카마이클에게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SNCC) 의장직을 넘겨준 66년 이래 흑인 유권자 조직-교육운동에 매진했고, 81년 조지아주 애틀랜타 시의원을 시작으로 정치에 입문해 86년 이후 숨질 때까지 조지아주 제5선거구 연방 하원의원으로 활약했다. 인권운동가로서 그를 돋보이게 한 것은 신념과 용기였고, 현실 정치인으로서 그를 차별화한 것은 도덕적 책임의식이었다. 활동가 이력을 밑천 삼아 당의 거수기 노릇으로 개인의 영달을 꾀하는 헐한 정치인들과 달리, 그는 자유와 인권, 반전-평화, 복지 의제에 관한 한 양보나 타협 없이 당 노선과도 자주 맞섰다. 하원 첫 임기 중 발의한 흑인인권역사박물관 건립 법안을 평생 고수하며, 2016년 마침내 문을 열게 했다.
그를 지킨 힘은 유권자들에게서 비롯됐다. 지역구 주민들은 그가 치른 16차례 총선 중 15번을 70% 넘는 지지율로 응원했고, 94년 선거 지지율도 69%였다. 그는 말도 탈도 많은 선거민주주의의 위대함을 드물게 구현한 정치인이었다.
자신의 장례식에 맞춰 내달라며 기고한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그는 당시 이슈였던 ‘Black Lives Matter’ 시위에 경의를 표하며 “평화의 정신과 영원한 사랑의 힘이 당신들을 이끌게 해달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