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SBS 드라마 '악귀'에서 구산영(김태리)은 아버지 유품이라고 받은 붉은 댕기를 만진 뒤 귀신에 씐다. 그에게 빙의된 귀신은 어려서 죽은 원혼인 태자귀. 무당이 신력을 높이기 위해 아이를 굶겨 죽여 귀신으로 만드는 염매 의식으로 희생된 여자아이였다. 김은희 작가는 "드라마에 나온 염매 기사(1958년 7월3일자)는 실제 기사"라며 "실화였던 기사라 쓰면서도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악귀'는 이렇게 민속신앙을 전면에 내세워 미스터리를 좇는다. 이 드라마는 방송 2회 만인 지난달 24일 시청률 10%를 돌파하며 인기다.
#2. 포대기에 싸여 문 앞에 버려진 아이를 집에 들이자 그 이후로 거짓말처럼 집에 돈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 아이는 재물을 불러온다는 업신. tvN 드라마 '구미호뎐1938'은 회마다 다른 토착신을 등장시켜 사건을 전개한다. 민속적 요소가 가득한 이 드라마(5,156만 분)는 6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티빙에서 예능프로그램 '댄스가수 유랑단'(2,362만 분) 등을 제치고 CJ ENM 계열 콘텐츠 통틀어 두 번째로 많이 재생됐다.
민속신앙을 주 소재로 한 드라마들이 안방극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심의와 장르물에 대한 문턱이 낮은 극장과 OTT, 케이블채널 중심으로 소개됐던 민속신앙 소재 콘텐츠들이 이젠 지상파까지 진출하며 세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인공지능(AI)이 희곡을 쓰는 IT 혁명의 시대에 염매와 업신이라니. 민속신앙 소재 드라마가 새삼 인기를 끄는 이유는 우리 사회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저출산과 지방소멸 문제 등으로 국가를 지탱하는 시스템 붕괴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커진 소멸의 공포는 사회적 약자부터 파고든다. '악귀'에서 빙의된 주인공은 취업 준비를 하면서 대리운전으로 학비를 버는 공시생이다. 현실에서 절망이 커지면 존재마저 의심하기 마련. '구미호뎐1938'은 일제강점기 민족말살통치가 본격화된 193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세 산신(이동욱, 김소연, 류경수)이 잃어버린 조선의 얼을 되찾는다.
이렇게 21세기 대중문화에서 옛 민속신앙에 대한 소환이 잇따르는 이유는 지켜야 할 것이 어떻게 손써 볼 틈조차 없이 사라지는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은 영아 살해·유기 사건에서 드러나듯 사회에서 '호명'되지 못한 이들의 비극은 처참하다. 민속신앙은 사회에서 투명인간 취급받고 스러진 서민이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민속신앙의 화두는 억눌리고 외면받았던 목소리의 발화와 청취"라며 "그 소재의 유행은 (알고리즘으로 보고 싶은 정보만 보게 해 편향성을 강화하는) 필터버블에 갇혀 타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사회적 약자의 호소까지 묵살하는 단절사회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분석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악귀'에선 아동학대와 청년 대출 피해 등에서 비극이 시작된다"며 "사회적 문제를 오컬트적으로 다루는 게 요즘 민속신앙 소재 드라마와 '전설의 고향'의 차이"라고 변화된 흐름을 짚었다.
K콘텐츠 열풍으로 해외에서 한국의 전통에 대한 관심이 덩달아 높아지면서 민속을 소재로 한 이야기 개발도 물밑에서 활발하게 이뤄지는 분위기다. 드라마와 영화를 제작하는 한 스튜디오 관계자는 "민속신앙을 소재로 한 시나리오들이 예전과 비교해 많아졌다"며 "글로컬라이제이션( glocalization·현지 문화의 세계화) 측면에서 상품성도 있어 눈여겨보는 중"이라고 귀띔했다.
민속신앙을 소재로 한 드라마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악귀'를 쓴 김은희 작가는 2021년 여름부터 관련 논문을 찾아보며 민속학을 공부했다. 안동대 민속학과와 국립민속박물관도 찾아갔다. 1일 방송된 '악귀'에선 백차골마을 주민들이 객귀를 내쫓기 위해 당제를 준비한다. 김 작가는 "충남 홍성 해변가에서 이뤄진 당제를 직접 보고 이 에피소드를 썼다"며 "이장님이 '뒤를 돌아보면 잡귀가 붙는다'고 말해 정말 뒤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빨리 나왔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구미호뎐'(2020)과 '구미호뎐1938'을 연달아 쓴 한우리 작가는 2018년부터 민속학을 파고들었다. 데뷔작인 드라마 '작은 신의 아이들' 속 주인공인 무속인 손녀(김옥빈)가 그 시작이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만든 시사교양 작가 출신인 그는 그후 5년 동안 세시풍속, 마을·무속신앙 자료를 모았고 '민속백과사전'까지 만들었다. 그가 제일 아끼는 자료는 시골 어르신들이 들려준 전설을 녹음한 파일. 한 작가는 "기승전결도 없고 가끔은 앞뒤도 안 맞는 그 이야기들이 참 따뜻하게 들렸다"고 말했다. '구미호뎐1938'에서 산신 이연(이동욱)은 업동이를 떠나보낸 뒤 "너나없이 가난했던 시절, 조선인들은 버려진 아기를 업동이라 부르며 거두어 기르곤 했다. 복을 부르는 아이, 그 이름은 굶어 죽을 뻔한 수많은 아기의 목숨을 구했다"고 읊조린다. 한 작가는 "이 내레이션을 쓰고 싶어서 업동이 에피소드를 꾸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