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처럼 날렵하고 묵직한 추상…이상욱 개인전 '더 센테너리'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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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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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캔버스에 흰 달이 떴다. 그 아래에는 둥그런 달과 대비되는 사각형 두 개가 놓여졌다. 포근함(달) 속에 영원히 머무를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은 이 작품은 지난 세기 한국 모더니스트 회화의 대표 주자였던 화가 이상욱(1923~1988)의 ‘점’(1973년)이다. 지금 이 작품을 서울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작고한 이후로 국립현대미술관(1992년)과 일민미술관(1997년)에서 열렸던 회고전 이외에는 대규모로 전시를 만나 보기 어려웠던 이상욱의 전시 ‘더 센테너리(The Centenary)’가 서울 종로구 학고재에서 이달 29일까지 열린다.

이상욱은 서정적 기하추상으로 유명한 특유의 추상세계를 확립한 작가다. 획을 한 번에 그은 것처럼 날렵하게 표현하면서도 캔버스에서 여유로운 여백을 찾아볼 수 있다. ‘작품 70’(1970년)이 그러한 특징이 드러난 작품이다. 간략한 선 몇 개만으로 해와 산, 강을 그려낸 작품이다. 여기에 ‘무제’ ‘독백’ ‘작품’ ‘상황’ 등의 제목이 붙여진 서체적 추상 연작들이 더해져 전시장을 풍성하게 만든다. 연작들은 1970년대 중엽부터 제작되기 시작해 ‘작품 86’(1986년)에 이르러 완성도가 최고조에 달한다.


무거운 무게감이 느껴지는 획들이 가득한 연작들은 추상화지만 서예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상욱은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나는 작품에서 까닭을 달기 위해 형체를 다듬는 따위의 일을 무척 싫어한다. 그저 답답한 마음에서 화필을 들어 꽃을 만들고, 짜임새를 찾아 헤매면 또 세차고 무겁도록 큰 덩어리를 맞게 된다”

정연심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가 쓴 전시 서문 ‘이상욱의 회화적 방법론: 서정적 기하추상과 서체추상’에 따르면 이상욱의 화풍은 1960년대 이후 한국에서 전개된 회화 양식의 흐름과는 거리가 있다. 기하학적 추상화를 말하는 ‘기하추상’이 1960년대 초반부터 전개됐고 단색화 역시 일정한 형태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기하추상은 기하학적 형태가 나타나는 특성 때문에 차가워 보일 수 있지만 이상욱은 작품 표면에 질감을 남기는 독특한 방식을 이용해 서정적인 추상을 구현해냈다. 이후 이상욱은 동양화를 연상시키면서도 리듬과 운율을 표현한 짧은 선들의 격렬한 움직임이 느껴지는 ‘서체추상’을 발전시켜 나간다. 정 교수는 “오늘날 잭슨 폴록의 드리핑 기법의 작품을 보고 작가의 움직임을 상상하듯이, 이상욱의 서체 추상은 부재하는 작가의 몸과 움직임까지도 상상하게 만든다”고 평했다.

김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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