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그동안 통일부는 마치 대북지원부와 같은 역할을 해왔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남북교류 촉진을 위해 대북지원 사업을 추진해온 통일부에 역할 변화를 강조한 것이다. 북한도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 의사를 이례적으로 외무성을 통해 거부하는 등 남북관계가 이른바 '국가 대 국가' 식의 2국가 체제로 가는 게 아니냐는 전망이 나온다.
윤 대통령은 지난주 지명된 김영호 장관 후보자 등 통일부 인사 관련 참모들에게 "이제 통일부가 달라질 때가 됐다"며 이같이 말했다고 김은혜 홍보수석이 2일 서면 브리핑을 통해 전했다. 윤 대통령은 "앞으로 통일부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통일이라는 헌법 정신에 따라 통일부 본연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라며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통일은 남북한의 모든 주민들이 더 잘 사는 통일,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통일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의 주문은 남북대화·교류 활성화를 위해 '선(先)지출' 방식을 택했던 통일부의 접근 방식을 전면 비판한 것으로 분석된다. 통일부는 2000년 남북정상 공동선언 채택 이후 대북지원 사업을 남북교류 활성화 수단으로 활용했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남북공동선언에 앞서 개성공단 사업과 금강산관광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남북대화 분위기를 주도했다.
윤석열 정부는 그러나 이 같은 접근이 북한의 비핵화 등 태도 변화를 견인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난달 정부가 북한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에 대해 447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전문가들은 윤 대통령 지시로 통일부의 역할이 남북교류 활성화·대북지원보다 북한 인권 조사 및 인권 메시지 발신으로 전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통일부는 남북교류 협력과 대북지원 사업을 많이 진행하는 것이 부처 본연의 업무라 인지해왔다"면서 "그러나 윤석열 정부가 바라보는 남북관계의 정상성은 북한에 유화 메시지를 발신하는 것에 있지 않은 만큼 향후 인권과 관련한 메시지 발신에 무게를 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문제는 윤 대통령의 접근이 당분간 남북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1991년 채택된 남북 기본합의서의 제1조는 상호 체제 인정 및 존중을 관계설정의 전제로 하고 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윤 대통령이 강조한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통일'은 북한 체제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남북관계의 특수성은 체제의 존중과 평화로운 통일, 즉 과정으로서의 평화에서 오는 것인데 이 조건들을 모두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부정하는 움직임은 최근 북한에서도 나오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전날 김성일 북한 외무성 국장 명의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 의사를 거절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대남 사업 관련 업무는 통상 조국통일평화위원회나 통일전선부가 담당해온 것과 달리, 이번엔 국가 간 관계를 담당하는 외무성이 발표한 것이 눈여겨볼 대목이다.
특히 외무성은 "남조선의 그 어떤 인사의 입국도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정부의 방침"이라며 우리 국민의 방문을 '입국'이라고 표현했다. 남북경제협력 사업을 관장해온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에 대해서도 금강산 관광지구에 "아무 권한도 행사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양 교수는 "남북관계를 특수관계가 아닌 일반적 국가관계, 즉 '투 코리아'의 가능성으로 보겠다는 것"이라며 "당분간 관계 개선의 가능성은 희박해보인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