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은 오십 문턱에 선 1975년생이 치른 1994학년도 수능이다. 1993년 한 해 8월과 11월 두 번의 수능을 치렀다. 단 한번 시험으로 당락 결정이 부당하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11월 수능이 너무 어렵게 출제돼 대부분 ‘여름 수능’ 점수를 쓰면서 수험생들 고생만 늘었다. 서울 몇몇 주요 대학이 13년 만에 본고사를 부활한 것도 그해였다. 상당수는 수능 2번, 본고사 1번을 치렀다. 혹자는 그들을 ‘마루타 인생’이라고 불렀다.
□20년 뒤에 태어난 1995년생은 선택형 수능 세대다. 사교육 의존도를 낮추겠다며 쉬운 A형과 어려운 B형으로 이원화했다. 서울 주요 대학 입학처장들이 혼란을 우려하며 도입 유보를 주장했지만 교육당국은 강행했다. 수험생들은 원서 접수 직전까지 A형과 B형 사이에서 오락가락했고, 정보를 얻으려는 학부모들이 대거 몰리며 교육업체 홈페이지 서버가 다운됐다. 그렇게 딱 1년 ‘실험’ 후 선택형 수능은 사라졌다.
□교육정책 마루타를 얘기하며 ‘이해찬 세대’를 빼놓을 수 없다. 김대중 정부 초기 이해찬 교육부 장관은 “특기 하나만 있으면 대학에 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선언했다. 야간자율학습과 월말고사 등을 전면 폐지했다. 수업 후에 악기, 바둑, 탁구 등 ‘특기’를 배웠는데, 뒤통수를 세게 맞았다. 기초학력이 떨어진 그들이 2001년 치른 수능은 역대급 ‘불수능’. 일부 학생은 모의고사보다 점수가 100점 넘게 하락했다. ‘패닉’에 빠진 학생들이 너도나도 하향 지원하면서 서울대 연세대 등은 미달 사태가 났다.
□올해 고3 학생들은 수능 5개월을 남기고 ‘킬러문항’ 실험 대상이 됐다. 대통령이 킬러문항을 사교육 폐단 진원지로 콕 집은 이후 대혼란이다. 교육부가 부랴부랴 킬러문항 사례를 제시했지만 정답률 30%가 넘는 문제까지 포함됐다. 킬러문항은 퇴출해도 변별력은 유지하겠다는데 준(準)킬러문항도 없다고 한다. 왜 사교육 전쟁을 치르는데 고3이 희생양이 돼야 하냐고 아우성이다. 어느 정부든 학생을 배려하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이 없으면 수험생은 늘 마루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