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러시아군 대병력이 우크라이나 국경선을 넘어 전쟁을 시작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극소수 전문가를 제외하면 세계 2위 군사대국 러시아가 빈국(貧國)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이처럼 고생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당시 러시아군은 최첨단 무기들을 앞세워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기세 좋게 국경 인근의 주요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했지만, 그 기세가 꺾이는 데 걸린 시간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다. 그 이후 러시아는 극심한 정치·경제·사회적 혼란을 겪었고, 급기야 무장봉기까지 일어났다.
압도적인 군사력 우위의 러시아가 이런 상황에 빠진 것은 '군수(Military logistics)' 때문이다. 러시아군이 고전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전문가들은 당시 러시아군의 기본 편제였던 대대전술단(BTG)이 전면전을 수행하기에는 군수 능력이 심각하게 결여돼 있다고 진단했다. 결국 그 진단대로 러시아군 부대들은 얼마 못 가 연료·탄약 부족으로 각지에서 기세가 꺾였다. 바그너그룹의 이번 쿠데타 배경 역시 군수 때문이다. 군수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러시아군 최전선 부대들은 늘 탄약과 물자 부족에 시달렸고, 부족한 보급품을 쟁탈하기 위해 정규군과 바그너그룹 간에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러시아가 전쟁에서 고전하는 것도, 쿠데타라는 극심한 내홍을 겪은 것도 결국 따지고 보면 군수 때문이라는 말이다.
20세기 이후 가장 많은 전쟁 경험을 쌓은 미국은 세계 각지에서 치른 전쟁을 통해 군수가 얼마나 중요한지 일찌감치 깨달았다. 이 때문에 주로 전차나 전투기 같은 보이는 전력에 관심이 많은 일반적인 나라의 군대들과 달리 미군은 수송선이나 수송기, 물류 시스템 현대화와 같은 분야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미군이 군수와 물류 분야에 얼마나 진심인지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미군은 유명 햄버거 체인인 'B'사의 이동식 햄버거 판매 트레일러나 'D'사의 피자 판매 트레일러를 전장까지 공수해 이제 막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장병들에게 따뜻한 햄버거와 피자, 시원한 콜라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런 미국이 최근 군수 분야에서 4차 산업혁명 기술을 접목한 놀라운 결과물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주요 물류 허브에는 로봇이 도입돼 자동화된 물류 처리 업무를 맡고 있고, 최일선 부대 일부에는 병사 대신 수십 ㎏의 군장을 짊어지고 병사와 함께 걷고 뛸 수 있는 4족 보행 로봇이 시범 배치되고 있다. 인공지능과 자율주행 기술이 적용돼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전술 기동'을 유지하며 물자를 실어 나를 수 있는 무인 트럭 시제 차량이 나왔고, 전장 한복판이나 망망대해에서 소량의 물자를 '포인트 투 포인트' 방식으로 택배 배달하듯 배송하는 드론도 배치되고 있다.
놀라운 것은 미군이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짐' 자체를 줄이는 혁신적인 기술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군수 보급품의 대부분은 탄약과 연료, 무기체계에 들어가는 여분의 부품, 식량과 식수, 의약품이다. 이 중 연료와 예비 부품은 부피도 크고, 품목도 다양한 데다 소모량도 많다. 이 때문에 미군은 4차 산업혁명 기술을 통해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몇 가지 시도를 하고 있다.
미 공군이 진행하고 있는 우주 태양열 에너지 활용 연구(SSPIDR) 프로그램은 육군의 초소형 이동식 원자로와 함께 일선 부대의 화석연료 사용량을 크게 줄여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는 사업이다. 이 프로그램은 말 그대로 우주 공간에 거대한 발전용 태양광 시스템을 쏘아 올린 뒤, 여기서 만든 전기 에너지를 무선 주파수 형태로 지상으로 전송해 이를 다시 전기 에너지로 전환하는 시스템이다. 이 기술이 완성되면 미군은 수신기만 있으면 지구 어디에 있든 무선 충전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다. 이 사업은 오는 2025년 발사를 목표로 제작 중인 '아라크네(Arachne)' 위성을 통해 처음으로 기술 시연이 예정돼 있다.
3D 프린터를 이용해 보급품을 아예 최일선 기지에서 생산하는 기술도 개발돼 시범 보급 중이다. 미 해군 강습상륙함 '에섹스'와 '바탄'은 지난해부터 컨테이너 형태의 이동식 3D 프린팅 스테이션을 싣고 다니며 필요한 부품들 가운데 일부를 배 안에서 3D 프린터로 인쇄해 사용하고 있다. 이 컨테이너 안에는 알루미늄 와이어를 잉크처럼 사용하는 3D 프린터가 실려 있고, 프린터는 알루미늄을 액체화한 뒤 필요한 부품 형태로 인쇄해 공급해주고 있다. 미 해군은 2018년에도 상륙함 에섹스함에 플라스틱 3D 프린터를 설치해 시범 운용한 적이 있었는데, 에섹스는 1년간의 해외 원정 작전 중 735개의 부품을 제작해 보급 소요를 줄이는 데 성공한 바 있다.
바탄 상륙함에 설치된 3D 프린팅 스테이션은 플라스틱·알루미늄보다 다소 가공 난이도가 높은 스테인리스를 이용한 각종 부품을 만들 수 있다. 바탄은 이를 통해 함정 내에서 필요한 각종 부품은 물론, 탑재 항공기에 필요한 부품도 자체 생산해 지난해 해외 정기 배치 기간 중 요긴하게 활용했다.
이러한 3D 프린터 기술은 미 공군도 도입 중이다. 미 공군은 지난해부터 일선 부대에 3D 프린터와 관련 매뉴얼, 부품들을 시범 배치 중이다. 3D 프린터를 이용해 생산되는 부품은 전투기·수송기용 부품은 물론, 일상생활에 필요한 드라이버나 렌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 기술이 가장 먼저 시범 배치된 주독미군 람슈타인 공군기지의 제86정비대대는 보고서를 통해 매뉴얼에 있는 부품 생산은 물론, 온라인 웹사이트의 오픈 소스 서버에서도 3D 프린팅 데이터를 받아 다양한 부품을 만들 수 있고, 그 부품의 종류도 무궁무진하다고 밝힌 바 있다.
최근 미 해군이 시범 배치 중인 인공지능 시스템 '아멜리아(Amelia)'는 미군 일선 부대에 배치되고 있는 이러한 첨단 기술을 더욱 영화처럼 만들어준다. 지난 몇 년간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할리우드 SF 영화 '아이언맨'을 보면, 주인공이 언제 어디에 있든 사람처럼 대화하며 조력자 역할을 하는 인공지능 비서 '자비스', '프라이데이'가 등장한다. 이들은 주인공에게 각종 정보와 외부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고하기도 하고, 다른 기계 장치와 연결돼 로봇이나 각종 무기를 만들기도 한다. 아멜리아는 바로 이런 인공지능 비서의 현실판이다.
대화형 인공지능 프로그램인 아멜리아는 전화나 통신장비를 이용해 사람처럼 대화가 가능하다. 인가된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사람과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을 수도 있고, 통신장비를 이용해 데이터 송·수신도 가능하다. 현재 초기 단계의 아멜리아의 주임무는 기술지원이다. 아멜리아는 각종 무기체계의 운용 매뉴얼과 정비에 대한 광범위한 데이터베이스와 연결돼 있으며, 인간 사용자가 육성·문자메시지·이메일 등을 통해 질문을 하면, 데이터베이스 안에서 솔루션을 찾아 답변을 해준다. 언제 어디서든 기술적 자문을 제공할 수 있는 이러한 인공지능 비서의 존재는 야전에서 전문 엔지니어의 필요성을 크게 줄여준다. 사용하는 무기체계가 고장 났을 때 미군 장병들은 수리공을 부르는 대신, 통신장비를 통해 아멜리아에게 육성으로 질문하고, 아멜리아가 제공하는 기술 데이터를 받아 현장에서 스스로 조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현재 각각 진행되고 있는 이 첨단 기술들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동될 예정이다. 몇 년 후, 우리는 아멜리아가 일선 무기체계들에서 발생한 기술적 문제를 스스로 인지하고, 3D 프린터로 부품을 만들어 드론으로 배송시킨 뒤 로봇으로 고장 부품을 교체하는 장면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인간이 손을 대지 않아도 모든 것이 알아서 척척 이루어지는 군수지원을 받는 군대, 앞으로 수십 년간 이런 군대를 이길 수 있는 군대가 지구상에 등장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