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현지시간) 밤 러시아 남부 도시 로스토프나도누. 철군하는 바그너그룹 용병들을 배웅하러 나온 시민들 앞에 대형 승합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바그너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탄 차였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반역자"로 규정한 그에게 시민들은 환호를 보냈다. 프리고진은 활짝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떠났다.
프리고진이 언제까지 웃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미국 CNN방송은 “프리고진은 자신의 등에 과녁을 그리고 떠났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정부와 맺은 합의에 따라 당장의 체포와 처벌은 면했지만 배신을 용납하지 않는 푸틴 대통령에게 살해당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번 무장반란을 주도한 프리고진은 푸틴 대통령의 오랜 심복이었다. 사기·성매매 알선을 일삼던 소년범이었던 그는 1988년 출소 후 차린 핫도그 노점에서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하급 관료이던 푸틴 대통령을 손님으로 만났다. 이 인연을 계기로 훗날 크렘린궁의 만찬을 총괄하는 사업가가 된 프리고진은 '푸틴의 요리사'로도 불렸다.
‘푸틴의 개’ 역시 프리고진의 별명이다. 2014년 민간용병기업 바그너를 만들어 푸틴 대통령이 시킨 온갖 더러운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미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바그너는 크림반도 강제 병합을 위한 전쟁과 시리아, 리비아, 수단 등 해외 내전에 참전했는데, 민간인 학살 등으로 악명을 떨쳤다.
바그너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최대 격전지인 바흐무트 전투를 주도한 지난해 이후 프리고진의 목소리도 커졌다. NYT는 “전사한 용병 시신을 전시하며 더 많은 지원을 요구하거나 바그너 용병이 정규군보다 훨씬 유능하다며 국방부를 위협했다”고 전했다. 이번 반란 역시 군 수뇌부와의 갈등이 폭발한 데 따른 것이다.
정부를 비난하면서도 푸틴 대통령은 저격하지 않았던 프리고진이 무장반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선 해석이 분분하다. NYT는 "제대로 된 포상이 없었고, 바그너를 쇼이구 장군 산하에 편입시키려는 크렘린의 명령에 화가 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취약해진 푸틴 대통령을 축출하고 정권을 잡으려는 욕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의 중재하에 프리고진은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신변 보장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약속이 지켜질지는 불투명하다. 질 도허티 전 CNN 모스크바지부장은 “푸틴은 반역자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프리고진은 어디에 있든 살해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푸틴 대통령은 정적과 배신자들을 제거하며 권력을 공고히 유지했다. 해외 도피자도 끝까지 쫓아가 죽였다. 반(反)크렘린 인사였던 전직 러시아 정보기관 요원이 2006년 영국 런던에서 방사능 성분이 든 차를 마시고 독살당했고, 크림반도 합병에 반대한 데니스 보로넨코프 전 하원의원은 2017년 우크라이나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프리고진은 바그너 용병 수만 명을 러시아 본토에 남겨 두고 떠났다. 러시아 정부가 프리고진의 재산을 압류하고 은행계좌를 동결하면 용병 유지가 어려운 만큼 바그너가 프리고진의 호위 무사 역할을 계속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이번 무장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바그너그룹 병사들과 (정규군 편입) 계약을 체결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바그너 용병들은 러시아가 아닌 프리고진에 충성하기 때문에 흩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CNN은 지적했다.
다만 프리고진이 로스토프나도누에서 모습을 감춘 지 약 20시간이 지난 25일 오후 7시(한국시간 26일 오전 1시) 기준 망명지인 벨라루스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프리고진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프레스 서비스는 그의 행방을 묻자 “질문은 프리고진에게 전달됐다.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뤄지는 시점에 답할 것”이라고 전했다고 CNN은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