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킨 한국인들이 웃고 있어요"... 89세 참전용사는 '보람'을 목격했다 [6·25 73주년]

입력
2023.06.2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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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찾은 에티오피아 유엔군 용사 2명
"민주주의 수호 일념으로 참전 결심"
"상처 적지 않지만 한국은 제2의 고향"

70년 하고도 두달.

한 인간의 생로병사를 통째로 대입할 수 있을 만큼의 긴 시간이 흘러, 열 아홉 살 청년 병사는 그 처절했던 지옥의 전장으로 돌아왔다.

6·25 전쟁에서 유엔군으로 참전한 에티오피아의 쉬페로우 비라투(89)씨는 22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전사자 기념비 앞에 섰다. 파릇파릇하던 청년의 얼굴엔 어느새 깊은 주름이 패였지만, 그는 70년 전처럼 반듯한 군복을 입은 채 날카로운 눈매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곤 '전사자 명패' 속에서만 남은 전우들의 이름을 직시했다.

그가 전우들 곁으로 돌아오는 동안,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한국은 선진국 반열에 올랐고, 비라투씨는 자신과 전우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이국의 노병이 신기한 듯 바라보는 꼬마들을 만난 그는 "과거랑 다르게 (한국 사람들이) 행복해 보여서 기쁘다"며 눈을 떼지 못했다.

16개국 청년들, 이름도 모르는 나라로 향했다

한국일보는 6∙25전쟁 발발 73주년, 정전 70주년을 맞아 한국을 찾은 2명의 유엔군 참전용사를 만났다. 또 지난해 9월부터 국가보훈부 장학금을 받고 있는 참전용사의 후손 2명과도 인터뷰를 진행했다. 참전 용사들이 전하는 '그날의 이야기'에는 전쟁이 빚은 비극과 아픔도 녹아 있었지만, 한국이 이룩한 번영과 평화에 자신들이 큰 기여를 했다는 자부심도 묻어있었다.

북한의 남침으로 한반도에서 발발한 6∙25전쟁은 참전국 수만 보면 사실상 '제3차 세계대전'으로 불릴 만큼 많은 나라들이 엮여 있다. 북한의 남침을 격퇴하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16개 국가가 유엔군이란 이름으로 전투에 가담했고, 의료지원까지 하면 22개국이 국군 참전자(87만4,686명)의 두 배가 넘는 195만7,733명을 보냈다. 유엔이 1945년 창설 이후 처음으로 군대를 파병한 전쟁이었단 점에서 이 전쟁은 국제사회가 최초로 집단안보를 실현한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참전국들이 한국 파병을 택한 이유는 서로 조금씩 달랐지만, 그 중에서도 에티오피아의 파병은 특별했다. 6∙25전쟁 15년 전인 1935년 에티오피아는 파시즘 국가 이탈리아로부터 침략을 당했다. 에티오피아는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의 구조 요청은 번번이 외면당했다고 한다. 그렇게 국제사회에서 당한 차가운 대접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6·25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 한국에 최정예 부대인 근위대 파견을 결정했다. 그 이후로도 에티오피아는 네 차례에 걸쳐 추가 파병을 했다.

에티오피아 파병군은 '초전박살'이라는 뜻을 가진 '강뉴 부대'라는 이름으로 활약했고, 253회 전투에 참전해 모두 승리하는 신화를 이룩했다. 전쟁 기간 중 121명이 전사할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지만 포로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에티오피아 청년들은 마치 자신들의 조국을 지키는 것처럼 용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여파로 극도의 사회 불안을 겪던 콜롬비아와 공산화 위협에 직면한 튀르키예 또한 ‘민주주의 수호’라는 열망에 불타 있긴 마찬가지였다.

1953년 3차 파병에 보병으로 참가한 에티오피아 참전 용사 테레페 이그자우(91)씨는 당시 상황을 두고 “드디어 우리가 다른 나라를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게 기뻤을 뿐”이라고 말했다. 콜롬비아 참전 용사의 손녀 스테파니 아르구에요(31∙콜롬비아)씨도 “당시 할아버지는 16세로 법적 성인 기준에 충족되지 않아 참전이 어려운 상황이었다"면서 "그럼에도 ‘집안은 맏이인 형이 책임지면 된다’고 간절히 호소해 전쟁터로 나가셨다”고 말했다.

민주주의 지켜낸 '대가'도 컸다

결사의 각오로 도운 유엔군 덕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한국은 전황을 역전시키는데 성공했고, 공산주의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승리의 순간마다 함께 했던 유엔군 참전용사들이 고국에서 모두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에티오피아에선 1974년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북한군을 상대로 싸웠던 참전용사들은 하루아침에 ‘민족 반역자’ 취급을 받아야 했다. 참전용사 다수가 빈민층으로 전락했고, 세상의 따가운 눈총도 감수해야 했다. 당시 사회 분위기에 대해 비라투씨는 “황실근위대 출신은 변변한 직장 구하기도 어려워 1990년대 정부가 바뀔 때까지 과거를 숨기면서 살아야 했다”고 회상했다.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흉터도 몸과 마음 곳곳에 남았다. 국방부에 따르면 6∙25전쟁 중 죽거나 다친 유엔군은 14만 명이 넘는다. 실종자와 포로 피해자도 1만 명에 육박한다. 아르구에요씨는 “할아버지도 전차 폭발로 전우를 잃고 당신 역시 큰 수술을 받았지만 끝내 다리를 저는 후유증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증조할아버지가 튀르키예 의료지원병으로 활동한 바소글루 압둘라(26)씨도 “수많은 사상자를 마주해야 했던 경험은 증조부에게 극복하기 쉽지 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고 거들었다.

섭섭함보다는 뿌듯함과 자랑스러움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급했던 한국은 참전용사들에게 보답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지 못했다. 한국 정부는 해외 용사들에 대한 보훈을 나중으로 기약했고, 어느새 국제사회에서 6·25전쟁은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 취급을 받으며 유엔군 참전용사에 대한 관심도 점점 옅어져 갔다.

야속할 법도 하지만 이들은 단 한순간도 참전 결정을 후회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도리어 ‘한강의 기적’을 자기 일처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이달 국내 비정부기구(NGO) ‘따뜻한하루’의 도움으로 한국을 다시 찾은 에티오피아 용사 이그자우씨는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괜찮았다”며 “이 곳은 내게 제2의 고향과 같다”며 활짝 웃었다.

튀르키예인 압둘라씨 역시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하도 얘기를 많이 한 덕에 마을에서 한국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인천공항에서 여의도로 가는 길 내내 감격의 눈물을 흘리셨어요.” 할아버지를 모시고 한국을 찾았던 아르구에요씨도 할아버지의 보람과 감격을 두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단다.

"전쟁으로 맺은 인연 소중히 여겼으면"

이들은 2023년의 한국이 6∙25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길 바라고 있을까. ‘연대의 교두보’로 여겨줬으면 좋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올해 2월 자국에 닥친 대지진을 계기로 한국의 형제애를 몸소 체감했다는 압둘라씨는 “다른 국가들도 많은 지원을 해줬지만 구호 물품을 보내기 위해 인천공항에까지 직접 차를 몰고 온 한국 사람들을 보며 마음의 도움까지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튀르키예 참전용사가 한국 전쟁 고아에게 먹을 거리를 건네는 장면과 한국 구조대가 튀르키예 지진 피해 어린이를 돕는 모습을 나란히 담은 그림을 가장 인상깊은 구호품으로 꼽기도 했다.

세대는 다르지만 비극이 재발돼선 안된다는 생각도 동일했다. 지난해 2월부터 1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유달리 가슴 아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치학을 전공하고 있는 아르구에요씨는 “할아버지는 시간을 되돌려도 6∙25전쟁에 참가할 분이지만, 사랑하는 가족이 위험에 빠지길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면서 “많은 이들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심을 기울이고 도움을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다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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