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학교 ‘줄리앙 아카데미’에 다니던 만 21세 화가 프랑수아즈 질로(Françoise Gilot, 1921.11.26 ~ 2023.6.6)가 나치 치하의 프랑스 파리 한 식당(Le Catalan)에서 거장 파블로 피카소를 만났다. 영화배우 알랭 퀴니(Alain Cuny), 퀴니를 짝사랑하던 화가 절친(Geneviève Aliquot)과 저녁을 먹던 자리. 다른 테이블에서 당시 연인 도나 마르(Dona Maar, 사진작가)와 있던 피카소가 체리 접시를 들고 다가와 퀴니에게 인사하며 일행 소개를 청했다. 피카소는 질로 등이 화가란 말에 반색하며 자기 작업실로 초대했다. 버찌가 열리고 장미가 흐드러지던 1943년 5월의 파리. 그렇게 시작된 둘의 인연을 훗날 질로는 “피하고 싶지 않던 재앙”이라 추억했다.
46년 5월 동거를 시작한 둘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각자 작업을 이어갔고, 질로는 피카소 주변 여러 문화계 명사들을 폭넓게 알아갔다. 47년 아들(ClaudePaloma) 49년 딸(Paloma)를 잇달아 낳은 질로는 53년 9월 피카소의 난폭한 바람기와 소유욕-통제욕을 참다 못해 그를 떠났다. “나같은 남자를 외면할 수 있는 여자는 없다”고 호언하던 피카소는 질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네게 관심이라도 있을 것 같아? 세상은 너란 존재엔 조금도 관심이 없어. 너를 좋아하는 것 같겠지만, 그건 나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일종의 호기심일 뿐이야.”
피카소는 세상을 알았고, 그의 예언같은 악담은 반은 적중했다.
질로는 피카소 이후 화가로서, ‘피카소와의 삶(Life with Picasso, 1964)’ 등 몇 권의 회고록 작가로서, 주목할 만한 성취를 이루었다. 평생 1,600여 점 그림과 3,600여 점 드로잉을 그렸고, 미국 뉴욕현대미술관 등 세계 굴지의 미술관에서 10여 차례 단독 초대전을 열었고, 몇 작품을 100만 달러가 넘는 경매가로 팔았다.
하지만 질로(의 전시회)는 ‘피카소’ 없이 언급된 예가 드물었다. 그는 늘 '피카소의 뮤즈’ 나 ‘피카소의 전 여인’이었고,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미국인 바이러스학자 조나스 소크(Jonas Salk, 1914~1995)와 70년 결혼하던 무렵엔 ‘예술가의 첩(concubine)’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세상(언론)의 집요한 호기심에 그는 “옛 연인에 대한 내 (증언)의무는 할 만큼 했다”며 짜증 내고 화도 냈지만 그리 달라지는 건 없었다.
질로가 지난 6일 뉴욕 맨해튼 한 병원에서 별세했다. 주요 매체들은 거의 예외 없이, 피카소와의 인연을 앞세워 부고를 전했다. 그렇게 그는 숨을 거둔 뒤에도 피카소(의 악담)로부터 결코 자유로워지지 못했고, 또 그렇게 20세기 여성 예술인의 씁쓸한 은유 하나가 완성됐다. 향년 101세.
피카소는 “여성은 두 부류, 여신과 현관매트(goddesses and doormats)로 나뉜다”고 말하곤 했다. 잠시나마 그가 여신으로 여긴 여성은 2명의 아내와 6명의 연인(mistresses)이었고, 스치듯 만난 이는 훨씬 많았다. 그들과의 연애는 더러 시기적으로 겹쳤고, 피카소는 자신의 매력과 재력으로, 거짓말로, 문화적 상징 권력과 물리력으로 그들을 육체적-정서적으로 통제했다. 피카소의 손녀 마리나 피카소(Marina Picasso)는 2001년 회고록 ‘내 조부, 피카소(Picasso: My Grandfather)’에서, 그의 인간관계, 특히 가족-여성들과의 관계를 "대단히 착취적이고 파괴적이었다"고 썼다. “가족 중 누구도 그 천재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그의 그림 하나하나의 서명을 위해 내 아버지와 오빠, 어머니, 할머니, 그리고 내 피가 필요했다”고 썼다. 마리나의 주장처럼 그 모든 비극을 그의 탓으로 돌리는 건 무리일지 모른다. 어쨌건 피카소의 두 번째 아내(Jacqueline Roque)와 첫 내연녀(Marie-Thérèse Walter)는 자살했고, 아들(Paulo)은 우울증에 시달리다 알콜 중독으로 숨졌고, 손자(Pablito)도 음독 자살했다. 하지만 화단을 비롯한 당대 사회는 저 비극적 에피소드들조차 천재 화가의 자유분방한 영혼과 뮤즈의 희생적 헌신으로 치장하곤 했다.
세 번째 연인 질로는 달랐다. 그는 "너는 내게 작업실 먼지 만큼이나 하찮은 존재"라던 피카소의 말에 "나는 결코 쓸려나가지 않고 내가 원할 때 스스로 떠날 먼지"라고 반박할 만큼 당찼다.
질로는 농학자 겸 사업가 아버지와 아마추어 수채화가 겸 도예가 어머니의 외동딸로, 파리 교외 부촌 뇌이쉬르센(Neuilly-sur-Seine)에서 태어났다. 엄한 가부장이었던 아버지는 질로에게 남자아이 옷을 입혀 아들처럼 대했고, 질로는 그게 싫지 않았다고 했다. 딸들이 듣는 ‘이건 안돼, 저건 하지 마’가 아니라, 사내애들처럼 ‘그래, 해봐(go ahead)’란 말을 들을 수 있어서였다. 고소공포증이 있던 질로에게 아버지는 높은 데서 뛰어내리게 했고, 승마를 익혀 불로뉴 숲을 달리곤 하던 질로가 10살 무렵 점프에 성공했다고 뽐내자 아버지는 장대를 걸어 뛰어넘게 했다. 왼손잡이였던 그가 양손잡이가 된 것도, 말년까지 양손으로 붓질을 하게 된 것도 아버지 덕(?)이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내면화하면서도 그의 권위를 사랑했다. 훗날 그는 '피카소'가 그리 낯설지 않았다고 말했다. 가정교사에게서 배우던 질로는 10세 무렵부터 학교를 다녔다. “나는 또래들보다 앞섰고, 생각도 그들과 달랐다. 의미 없어 보이는 규칙에는 복종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딸이 과학자나 법률가가 되길 바랐지만, 질로는 5세 무렵부터 어머니 등 영향으로 그림에 마음을 두었다. 그가 소르본 대학과 케임브리지대에서 각각 철학(38년)과 영문학(39년) 학사 학위를 받은 건 부녀의 엇갈린 바람의 타협점이었다. 하지만 39년 나치 점령 직후 아버지는 딸을 파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렌(Rennes)으로 옮기게 한 뒤, 파리대학 로스쿨에 진학시켰다. 질로가 파리 개선문 무명용사 묘지 헌화 행사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연행-구금된 게 그 무렵이었다. 그는 풀려난 뒤로도 한동안 매일 관할 경찰서에 하루 일과를 보고해야 했다. 질로는 로스쿨 2년차 구두시험을 망친 뒤 로스쿨을 중퇴, 야수파 거장 마티스와 마르셀 뒤샹 등을 배출한 줄리앙 아카데미에 등록했다. 몰론 그 사이에도 그는 헝가리 출신 초현실주의 화가 엔드레 로주더(Endre Rozsda) 등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유대인이던 로주더는 43년 신변 위협을 느껴 파리를 떠났고, 피카소를 만나던 무렵 질로에겐 새 스승이 필요했다.
자살로 생을 마친 피카소의 연인 마리 테레즈의 손녀 디아나 비더마이어 피카소(Diana Widmaier-Picasso)는 할아버지를 “변신의 귀재(man of metamorphoses)”라고 했고, 질로는 “자기가 원할 땐 한없이 신사다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포토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파의 저 유명한 사진에서처럼, 해변 백사장에서 파라솔을 들고 연인에게 그늘을 드리워준 것도 그였고, 자기 없이 해변에서 휴가를 보내고 왔다고 연인의 오른뺨을 담뱃불로 지진 것도 그였다. 질로는 “그는 내가 용서를 빌며 조아리길 기대했겠지만, 나는 그에게 만족감을 주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회고록에 썼다.
피카소는 질로에게 “왜 늘 어깃장을 놓느냐”고 따진 적도 있었다. 질로는 “그게 대화”라고, “싫으면 혼잣말을 하라”고 답했다. 아이를 원한 것도 피카소였다. “파블로는 끊임없이 내가 임신을 하고 있기를 원했다. 그러면 내가 약해지니까.” 질로를 모델로 한 임산부 조각을 질로가 싫어하자 피카소가 조각한 여인의 다리를 잘라버린 적이 있었다. 질로는 “(하지만) 나는 내 다리로 걸을 수 있다”고 맞섰다. 석판화 ‘여인의 초상(Portrait de femme)' 제목에 자기 이름을 쓰지 말라고도 요구했다. “그를 통해 내 나르시시즘을 표현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마티스가 질로의 초상화를 그리겠다고 하자 질투심에 그렸다는, 드물게 질로가 소유했던 피카소 작품 ‘꽃을 든 여인(la femme-fleur, 1946)'를 80년대 팔아버린 것도 거기 깃든 불편한 추억 때문이었다. 피카소는 질로와 함께 한 약 10년간 그를 모델로 그림과 드로잉 1,000여 점을 그렸고, 꽃이나 체리, 갑옷 입은 기사로도 그를 은유했다. 랍스터도 그중 하나였다. 피카소는 질로를 외골격 두른 랍스터에 비유하곤 했다고 한다.
결별 후 피카소는, 질로에 따르면 "내 발밑에 바나나껍질을 펼쳐놓았다."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역의 주요 화랑에 자기 작품을 걸고 싶으면 알아서 하라고 통고했고, 52년 질로와 전속 계약한 갤러리(Louise Leiris)에는 계약 철회(55년 해지)를 종용했다. 55년 질로가 오랜 친구였던 화가 뤽 시몽(Luc Simon, 62년 이혼)과 결혼하자 압박은 더 거세졌고, 두 차례 소송까지 벌이며 출간을 저지하려 했던 회고록이 64년 미국서 나오자 아이들과의 연락조차 끊었다. 미술계-출판계는 담합이라도 한 듯 책을 폄하했고, 프랑스 공산당도 핵심 간판 당원이던 피카소 편에서 흠집내기에 가세했다.
질로는 자신에게 작업실을 제공한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 갤러리를 거쳐 61년 뉴욕으로 주요 활동 무대를 옮겼다. 출간 첫해 100만 부 넘게 팔리며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회고록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질로의 명성에 기여했다. 그는 책 인세 대부분은 아이들의 상속권 등을 둘러싼 소송 비용으로 쓰였다고 했다. 피카소 사후 두 아이는 각각 총 유산(당시 기준 약 2억 6,000만 달러)의 1/10을 상속받았다.
2016년 가디언 기자가 질로에게 피카소를 떠나 자유를 얻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나는 죄수였던 적이 없다. 머문 것도 떠난 것도 모두 내 의지였다”고 말했다. 피카소에 대한 질문에 신물이 난 듯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오직 하나만 알면 당신은 줄곧 그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게 된다”고도 말했다. 그는 대중적 관심과 인기를 원했지만, 그 때문에 자신의 가치와 사생활이 폄하-훼손당하는 데 분노했고, 아예 인터뷰를 거부하거나 무례할 만큼 거친 단답형 답변으로 일관하기도 했다. 소크와 결혼한 뒤에는 유명인들의 후광으로 주목받고자 하는 것 아니냐는 모욕적인 시선에도 시달렸다. 91년 한 잡지(Mirabella magazine) 기자는 그에게 ‘어떻게 그 유명한 사람들을 둘씩이나 사로잡았느냐'고 물었다. 질로는 “나도 그들 만큼이나 흥미로운 사람이기 때문 아닐까. 사자는 사자와 짝을 짓지 생쥐와 짓지 않는다”고 말했다.
질로가 소크를 처음 만난 건 1969년 캘리포니아 샌디에고 ‘소크생물학연구소’ 건축답사 때였다. 라호야(La Jolla) 해안 언덕에 63년 개장한 연구소는 '연구소 건축의 전범'으로 꼽히는 건축가 루이스 칸(Louis Kahn)의 걸작. 한 해 전 이혼한 연구소장 소크가 일행을 안내했고, 질로의 “우아함과 지성”에 반해 만난 지 6개월 만에 청혼했다. 질로는 소크의 소탈한 개성과 윤리적 인품에 호감을 느꼈지만, 결혼 의사는 없다며 몇 가지 이유를 댔다. ‘내 시간이 필요하다’ ‘한 해 6개월 이상 누구와 함께 살고 싶지 않다’ 등등…. 소크는 질로에게 원하는 바 결혼의 조건을 적어달라 청했고, 그걸 본 뒤 즉석에서 “다 좋다. 내 뜻에도 완벽히 부합한다”고 했다고 한다. 둘은 한 달 뒤 파리에서 각자 자녀에게도 알리지 않고 결혼식을 올렸다. 둘은 오래 못 가리란 다수의 예상을 깨고 95년 소크가 숨질 때까지 해로했다. 만년의 소크가 "내가 아는 인간 중 가장 진화한 사람 중 한 명"이라 평했던 질로는 조건대로 뉴욕과 파리, 샌디에고를 오가며 살았고, 소크 사후에도 연구소 연례 기금모금 행사에 작품을 기증하고 명예 대회장 등을 맡아 봉사했다. 그는 첫 남편 시몽과 낳은 딸(Aurélia)까지 1남 2녀와 세 의붓아들(소크의 아들)을 두었다.
2012년 뉴욕 가고시안(Gagosian) 갤러리가 ‘피카소와 프랑수아즈 질로, 1943-1953’ 전시회를 열었다. ‘피카소의 아바타’라 불리며 피카소 생시부터 사후까지 몇 권의 피카소 전기를 출간한 예술사가 존 리처드슨(John Richardson)이 공동 기획자 겸 큐레이터였다. 그는 질로의 회고록에 대한 ‘뉴욕 리뷰 오브 북스’ 서평에 “이 끔찍한 책은(…) 솔직함을 가장한 몰지각과(…) 전의와 악의로 가득 찬 끔찍한 책(wretched book)”이라 쓴 적이 있었다. 전시회 직전 인터뷰에서 그는 “피카소 사후에 책이 출간됐으면 더 나았을 것”이라며 “책 자체는 매혹적이고 훌륭하며 피카소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라고 평했다. 그는 “피카소가 질로에게서 받은 영향이 질로가 피카소에게서 받은 영향보다 더 많았다”고 평했다.
질로는 자신이 이룬 것들이 단지 피카소와 함께 보낸 시간 덕은 아니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로서 살기 위해 누구의 허락도 구한 적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