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차 직장인 임모(30)씨는 3년 전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렸지만 출산 생각이 전혀 없다. 결혼 전부터 딩크(DINK·자녀를 갖지 않는 부부)족으로 살기로 약속했기 때문.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금융회사에서 부동산 개발업무를 담당하며 성공적으로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는 임씨에게 출산은 미혼 시절부터 넘기 힘든 허들로 여겨졌다. 결혼을 했지만 아이보다 일을 통한 자아실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임씨는 "주변에서 출산과 동시에 업계를 떠나거나,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육아에 얽매여 힘들어하는 여성들을 수없이 봤다"면서 "아이로부터 오는 기쁨도 크다지만 내 삶에 집중하면서 느끼는 행복을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공기업에 다니는 임씨 남편도 비(非)출산 의지가 확고하다. 그는 자녀에게 교육 등 충분한 지원을 하지 못한다면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임씨는 "남성과 여성에게 요구하는 역할이 다른 사회에서 아이를 낳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면서 "의식주와 육아에 들어가는 부담을 걱정하지 않고 사는 시대가 온다면 우리도 아이를 낳지 않을까 생각도 해봤다"고 말했다.
비출산을 결심한 이들이 출산의 최대 장애물로 꼽는 요인은 성차별적 가족문화다. 개인이 아닌 부부를 가족의 기본 단위로 보고 이 부부에게 사회적·경제적 생존 책임을 전적으로 떠맡기는 게 전통적 한국의 가족문화. 이는 '남성 부양·여성 가사노동'이라는 성별 분업으로 유지됐다. 과거에는 효과적이었지만 남성 외벌이만으로 생존이 불가능해지면서 현실적 효용가치를 다했다. 하지만 여전히 남성에게는 주로 부양을, 여성에게는 가사노동을 요구하는 성차별적 관념은 뿌리 깊다. 관념과 현실의 괴리로 개인은 사회적 성취와 출산·육아 중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 결국 '결혼+비출산' 혹은 '비혼+비출산'이라는 선택지로 내몰리게 된 것이다.
'결혼-출산'을 전제로 가족을 상상하는 기성세대는 이런 선택을 이해하지 못한다. 임씨 부부의 부모님과 주변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안정적 직장에 다니는 부부의 가구 소득은 연 1억1,000만 원 정도다. 부모 세대에게 이 부부의 경제적 조건은 아이를 낳기에 부족함이 없는 수준이다. 정작 임씨는 "업무상 1주일에 나흘은 업계 사람들을 만나는 데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이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한다. "육아의 짐을 엄마에게만 지우는 현실이 눈앞에 있는데 결혼했으니 자연히 아이를 낳을 거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미혼 남녀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은 사회적 성취를 달성하면서 출산, 육아를 동시에 수행하는 고난도 퍼즐을 풀기보다는 더 나은 조건을 갖추기 위해, 혹은 부담과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결혼-출산' 선택지를 후일로 미룬다. 취업해서 연애를 하고 이른바 결혼적령기에 결혼해 출산하는 전통적 생애 주기 사이클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최근 내놓은 '가족형성과 사회불평등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1998년부터 2020년까지 한국노동패널 자료를 분석한 결과 30세 시점의 미혼율은 1969년생 남성의 경우 37.3%였으나 89년생 남성에서 73%로 증가했다. 69년생 여성의 미혼율 역시 13.8%였으나 89년생 여성은 53.3%로 증가했다. 20년 사이에 30세 여성의 미혼율이 네 배나 증가한 것이다. 결혼 후 집안 살림과 육아를 전담하는 어머니, 꿈을 포기하고 아이를 키우는 경력 단절녀 선배의 사투를 생생히 지켜본 미혼 여성들에게 비혼·비출산은 나름의 생존 전략이었던 셈이다.
중소기업 사무직으로 근무하는 최수연(27)씨도 그런 경우. 최씨는 "작은 회사에서는 아직도 면접 때 '남자친구 있느냐', '결혼 생각이 있느냐', '애를 가질 생각 있냐'라고 물어보는 곳이 있다"며 "여성에게는 결혼과 자녀 계획 자체가 취업 성패에 영향을 준다"고 했다. 당장 최씨가 처음 직장을 얻었던 한 자리가 바로 출산한 이후 복직하지 못한 여직원의 자리였다. 결혼을 한다 해도 육아와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상황은 결코 마주하기 싫은 미래다. 그는 "평소에 아버지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어머니만 집안일을 도맡는 모습을 봐왔다"면서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나 또한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지 않나"라고 토로했다. 그는 "결혼과 출산은 하고 싶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선택"이라고 단호히 말했다.
가족 부양은 남자가 책임져야 한다는 성 역할을 내면화한 남성들에게도 결혼과 출산은 갈수록 고르기 힘든 선택지가 되고 있다. 과거에 비해 양질의 일자리를 얻기 쉽지 않은데다 출산과 육아를 선택하기 위한 체감 비용이 몰라보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가족을 꾸리고 아이를 낳을 의향이 있어도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루거나 단념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는 최동준(28)씨도 결혼하면 자신이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에 4년간 교제한 여자친구와의 결혼을 미뤘다. 인터넷 쇼핑몰 사업을 갓 시작한 최씨는 "여자친구는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관계를 원하지만 사업을 막 시작한 나는 그럴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보니 결혼이나 동거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된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최씨는 "아이를 두 명 이상 낳고 싶지만 역시 돈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결혼 5년차 맞벌이인 박지성(37)씨는 최근 둘째 출산 계획을 완전히 접었다. 신혼 때는 아이를 두 명 이상 낳겠다는 자녀 계획을 세웠다는 박씨 부부는 팬데믹 기간 첫째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생각이 180도 바뀌었다고 한다. 코로나로 어린이집 휴원조치가 내려질 때마다 휴가와 재택근무, 부모님에게 도움을 받으며 겨우 넘겼지만 계속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육아 '현타'(현실자각타임)보다 더 큰 문제도 있다. 맞벌이부부지만 경제적 부담이 적지 않다고 했다. 그는 "한 명 월급으로 대출을 갚고 다른 한 명 월급으로 생활비를 충당하는데 아이가 한 명이어도 근근이 균형 재정을 유지한다"며 "둘째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남성들 사이에서 '결혼과 출산은 소득순'이라는 자조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해 발간한 '노동과 출산 의향의 동태적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17~2019년 20대 중후반(26~30세) 남성의 소득 상위 10%(10분위)의 결혼 경험 비율은 하위 10%(1분위)의 3배를 뛰어넘는다. 40대 중후반(46~50세)에 이르면 소득 상위 10분위 남성의 결혼 경험은 100%에 가깝지만 하위 10%는 10명 중 3명이 결혼을 하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남녀 모두가 불행한 성차별적 가족문화를 그대로 둔다면 저출산 문제의 해결은 요원하다고 지적한다. 성차별적 가족문화를 혁파하는 첫 단추는 여성이 경력단절을 우려하지 않고 회사를 다닐 수 있도록 노동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여성이 경력단절이 되고 복직하더라도 임시직 등의 일자리로 밀려나는 상황에서는 부부가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기가 어렵다”면서 “국가가 남녀 모두 육아휴직을 할 수 있도록 기업들에 인건비 등을 강력하게 지원하되 육아휴직자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눈치를 보게 만드는 기업들은 문 닫게 하겠다는 각오를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시간 단축, 돌봄 서비스 강화, 교육비 절감 등은 필수적이다. 이러한 정책들을 바탕으로 남녀 모두가 일과 육아를 함께하는 성평등한 가족문화가 형성된다면 출산율도 높아질 것이라는 것이 신 교수의 설명이다. 진미정 서울대 아동가정학과 교수는 "현재 맞벌이 비율이 절반 정도인데, 맞벌이를 전제로 정책설계를 해서 여성의 경제활동참여율을 더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며 "가족 친화적 직장환경을 만들어 근로시간의 자율성과 유연성을 확보해야 남녀 모두 일 가정 양립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갈수록 다양해지는 가족 형태를 고려한 지원책도 필요하다. 배정원 세종대 겸임교수(보건학 박사)는 “젊은이들이 좀 더 쉽게 서로를 만나고 그 안에서 아기를 낳도록 하려면 프랑스나 핀란드, 스웨덴처럼 사실혼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에게 기혼 가족에게 버금가는 복지를 제공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배 교수는 “가족주의란 것은 결국은 가부장제를 말한다”면서 “혼인 지상주의 국가가 돼 가고 있다는 건 다른 삶을 선택한 이들에게 불이익을 준다는 것이고 결국 결혼 해체, 가족 해체 혹은 국가 소멸로 가게 된다. 아이를 낳든 안 낳든 개인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국가의 책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