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1.8 대 한국 0.78.' 지난해 프랑스와 한국의 합계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출생아 수)이다. 지난해 출생아 수로 보면, 프랑스에선 72만3,000명이 태어났고 한국에서는 24만9,000명이 태어났다. 프랑스 인구(6,800만 명)가 한국(5,163만 명)보다 많다는 점을 감안해도 차이가 크다.
프랑스는 유럽연합(EU) 회원국 27개국 중 합계출산율 1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8개국의 평균(1.59명·2020년 기준)보다 높다.
프랑스도 한때 저출생을 고민했다. 1950년 2.93이었던 합계출산율이 1993년 1.65까지 꺾이자 적극적으로 출생률 부양책을 폈다. 가장 효과를 본 것이 '혼외 출생을 제도적으로 차별하지 않는 정책'이다.
'시민연대계약(Pacte civil de solidarité·PACS·팍스)'을 맺은 동거 커플에게 결혼한 커플과 똑같은 출산·육아 지원을 하는 정책이 대표적이다. 1999년에 도입된 팍스는 '결혼은 싫은데 아이는 갖고 싶은' 남녀 모두에게 유효한 대안이었다. 2010년대 출생률은 2명대까지 올랐다.
프랑스에서 지난해 태어난 아이의 63.8%가 혼외 출생아였다. 비혼 출생의 비중은 2002년 45.2%에서 2012년 56.7%로, 2022년 63.8%까지 계속 늘었다.
프랑스가 확인했듯 '혼외 출생의 제도권 편입'은 출생률을 높이는 빠른 대안이라고 전 세계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그러나 한국에선 거부감이 상당하다. 저출생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면서도 혼외 출생은 비윤리적인 행위로 보는 경향이 크다. 건강가정기본법도 혼인이나 혈연으로 연결돼야 이른바 '정상 범주의 가족'이라고 규정한다. 한국의 혼외 출생 비율은 2021년 기준 2.9%에 불과하다.
'0.78'이라는 절박한 숫자 앞에서 다양한 해법, 특히 검증된 해법을 연구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한국일보는 프랑스의 혼외 출생 장려 정책이 출생률 상승을 어떻게 견인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파리의 유자녀 비혼 시민들과 출생 정책 전문가들을 만났다.
한국일보는 파리 중심부 튀일리정원에서 아이를 동반한 성인 10명에게 물었다. "프랑스에서 혼외 출생은 자연스러운 일입니까." 결혼한 4명, 동거 중이거나 팍스 계약을 맺은 5명, 베이비시터 1명 모두 "그렇다"고 답했다.
프랑스 국립 인구통계학연구소(INED)의 로랑 툴레몽 선임연구원은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결혼과 출산을 '선후관계가 있는 하나의 패키지'로 보지 않고 '개별 사건'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혼외 출생'과 '결혼 내 출생'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선 출산 수당, 입양 수당, 양육 지원금 등 정부의 각종 혜택을 '부모 또는 가족'이 아닌 '아이'를 기준으로 준다. 한부모 가족 비율도 높아서 2020년 기준 전체 가족 중 4분의 1을 차지했다.
14세 딸을 키우는 '팍스 파트너' 마리 발레로(48)와 알렉스 베나마르(49)에게 결혼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결혼식을 올리고 서류에 '남편'과 '아내'로 기록되는 것에 우리 가족은 큰 가치를 두지 않아요. 중요한 건 '우리'예요. 결혼하지 않았어도 우린 서로를 '가족'으로 부르고 아낍니다. 행복해요."
한국에선 '결혼을 해야 아이를 낳거나 기를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는 인식이 저출생을 심화시킨다. 지난해 한국의 결혼 건수는 19만2,000건, 조혼인율(인구 1,000명당 결혼 건수)은 3.7건이었다. 두 수치 모두 1970년 통계 작성 이래 최저치였다. '결혼을 전제로 한 출산'을 권하는 현행 제도의 효과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청년층의 인식은 서서히 바뀌고 있다. 여성가족부의 2020 가족실태조사에 따르면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는 것에 동의한다"는 응답 비율이 15.4%였는데, 2015년(9.4%)보다 상승했다. 특히 12~19세(2015년 9.6%→ 2020년 20.7%), 20~29세(8.3%→23.0%), 30~39세(13.0%→18.3%) 등 가임기 혹은 예비 가임기 응답자들의 인식이 달라졌다.
'팍스 파트너' 발레리와 함께 두 자녀를 키우는 로랑 자리지(54) 이야기를 들어봤다.
"결혼할 생각도, 아이를 키울 생각도 없었어요. 자유롭고 싶었거든요. 발레리를 사랑하기에 늘 같이 있고 싶어서 동거를 택했고, 그러다 자연스럽게 '아이를 가지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그렇게 아들 레뇨(11)와 딸 렝캬(6)를 낳았죠. '가족은 이래야만 한다'는 압박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출산을 고려할 여유가 생겼어요. '발레리를 사랑하면 결혼을 하고, 결혼을 했으니 자녀를 낳아라'는 압박을 느꼈다면 주저했을 거예요."
"결혼한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된 부모와 이들이 낳은 자녀로 이뤄져야 가족"이라는 프레임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 낳을 기회를 처음부터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영철 서강대 교수는 20일 한반도미래인구연구원 주관 세미나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혼외 출생 비율과 합계출산율 사이에 39%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분석을 토대로 "유연한 가족제도의 도입이 적극적인 출산율 방어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말했다.
팍스는 동성 간 결혼이 허용되지 않았던 시기에 "동성 커플을 결혼한 것에 준하는 파트너로 인정해 법적으로 보호하겠다"는 취지에서 도입됐지만, 결혼 제도에 대한 부담 때문에 팍스를 원하는 이성애자도 많았다. 2021년 팍스 체결 건수는 20만9,000건으로, 1999년 법 제정 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결혼 건수(21만8,000건)와 비슷하다. 팍스 커플의 출생률은 1.73명으로, 결혼 커플과 비슷하다(2019년 기준).
르 손(37)은 정부에서 출산·육아 지원을 받기 위해 팍스를 택한 경우다. "팍스를 통해 경제적으로 좀더 여유가 생겼어요. 아이를 키우는 데도 큰 문제가 없고요. 팍스 때문에 손해 봤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한국에도 팍스와 비슷한 취지의 '생활동반자법안'이 지난 4월 발의됐지만, 반대 여론이 많다. 가족 개념을 유연하게 만들면 사회 시스템이 흔들린다는 것이 반대 논리다.
팍스 파트너와 아이를 낳은 래티샤 부체는 이렇게 말했다. "가임 기간은 정해져 있잖아요. 아이를 갖고는 싶었는데 파트너와 결혼할 정도의 확신은 없었어요. 그래서 일단 2007년에 팍스를 체결한 뒤 2009년과 2014년에 두 아이를 낳았습니다. 살면서 파트너에 대한 확신을 얻었어요. 조만간 결혼하려 합니다."
이른바 '정상 가족' 신화를 깬다고 출생률이 곧바로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가족을 설계하고 구성할 수 있는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은 저출생 문제 해결의 필요조건 중 하나일 뿐이다. 결혼과 출산을 인생의 걸림돌로 느끼게 하는 제도와 문화를 바꾸는 것이 근본적 해법이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툴레몽 선임연구원이 한국 사회 특수성을 고려해 제안한 내용은 이렇다. "①일 때문에 부모가 아이를 돌보지 못하는 환경을 바꿔야 한다. ②출산과 양육 부담을 더 많이 떠안은 여성이 '아이를 낳아도 삶이 망가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게 해야 하며, 이를 위해 가정과 직장의 성차별 해소가 필수다. ③부모가 '좋은 부모' 강박에서 벗어나게 해줘야 하고, 그러려면 양육과 교육의 책임을 국가의 어깨에 둬야 한다. 특히 공정하고 평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④ '아이를 낳으면 돈을 주겠다'는 식의 단발성 접근은 독이다. '저 돈을 보상으로 받고 난 뒤엔 지옥행인가'라는 인식을 퍼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료: 프랑스 국립통계경제연구소, 한국 통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