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엘리엇)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1조 원 규모의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에서 정부에 690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정 선고가 나왔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승인 과정에서 정부가 부당한 압력을 행사해 손해를 봤다며 엘리엇이 정부를 제소한지 5년 만에 나온 결론이다.
법무부는 20일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 중재판정부가 엘리엇이 제기한 ISDS에 대해 "한국 정부가 5,358만6,931달러(이날 환율 1,288원 기준 약 690억 원)를 배상하라"고 판정 선고했다고 밝혔다. 앞서 엘리엇 측이 청구한 7억7,000만 달러(약 9,917억 원) 대비 7% 상당 금액으로, 법조계에선 당초 예상보다 선방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법무부는 "정부가 93% 승소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지연이자와 법률 비용 등을 합하면 1,300억 원대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중재판정부는 배상 원금에 2015년 7월 16일부터 판정일까지 5% 연복리 이자를 지급하라고 정부에 명했다. 법률 비용은 엘리엇이 정부에 약 345만7,480달러(약 44억5,000만 원)를, 정부가 엘리엇에 약 2,890만3,189달러(약 372억5,000만 원)를 주도록 판정했다.
엘리엇은 2015년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관련 투표 찬성 압력을 행사해 엘리엇과 주주들이 손해를 봤다고 주장하며 2018년 7월 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을 요구했다. 당시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한 3대 주주였던 엘리엇은 합병 비율(삼성물산 1주당 제일모직 0.35주)이 부당하다며 반대했다. 합병 결정을 막기 위해 국내 법원에 삼성물산 관련 주주총회 결의 금지, 자사주 매각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지만 기각됐다.
가장 큰 쟁점은 정부 개입이 실제 합병에 영향을 줘 엘리엇 측에 손해를 끼쳤는지 여부였다. 엘리엇 측은 2021년 11월 구술심리에서 "정부의 불법적 개입이 없었다면 국민연금은 합병에 찬성하지 않았을 것이고, 몰수 수준 합병이 없었다면 삼성물산 가치 상승을 통해 엘리엇은 장기적으로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부는 "국민연금이 합병에 반대했을지 확실치 않고, 손해액 산정 근거도 전혀 제시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엘리엇의 ISDS 제소 빌미가 된 '국정농단' 사건의 국내 재판 결과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엘리엇 측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홍완선 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이 직권을 남용해 국민연금이 절차를 뒤엎고 잘못된 합병 찬성 결정을 내려 엘리엇에 피해를 줬다"며 관련 재판에서의 유죄 판결을 강조했다. 중재판정부는 정부에 특검 수사, 법원 공판 기록 및 국민연금 내부 회의록 등을 제출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문 전 장관과 홍 전 본부장은 국민연금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하도록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 혐의가 일부 인정돼 지난해 4월 징역 2년 6개월이 확정됐다. 이들은 외부인사로 구성된 '국민연금 주식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가 합병에 반대할 것을 우려해 내부 투자위원회에서 안건을 다루도록 압력을 넣고, 합병에 따른 시너지 효과를 조작해 투자위원회 위원들의 합병 찬성을 유도한 혐의를 받았다.
ISDS는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법령·정책으로 피해를 봤을 때 국제 중재를 통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제도로, 양자 간 투자협정(BIT)이나 자유무역협정(FTA)의 관련 조항을 근거로 제시한다. 미국계 사모펀드 메이슨도 2018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부당 개입으로 2억 달러(약 2,576억 원)의 손해가 발생했다며 문제를 삼기도 했다. 이번 엘리엇 사건 관련 판정은 메이슨 사건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판정문을 면밀히 분석해 불복 절차 등을 검토할 방침이다. 법무부는 그간 국무조정실·기획재정부·외교부·산업통상자원부·보건복지부 등과 합동 대응체계를 구성해 ISDS 절차를 밟아왔다. 법무부는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시작된 2018년부터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대응해 왔으며, 앞으로도 국익에 부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ISDS의 판정 선고 후 판정부의 권한 유월, 이유 불기재, 절차규칙 위반 등의 문제가 발견될 경우 120일 이내 취소 신청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