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행사에서 근무하는 디자이너 허민지(가명·34)씨는 입사 1년도 안 돼 이직을 준비 중이다. 비인간적 업무 강도 때문이다. 길어야 사흘, 보통은 다음 날까지 '쳐내야' 하는 프로젝트가 평균 3개. 기획부서가 수시로 요청하는 견본 디자인, 회사 경영진이 개인적으로 따오는 프로젝트까지 합치면 일 네댓 개를 동시에 쥐는 건 예사다. 감기·몸살이나 생리통으로 컨디션이 안 좋을 때 진통제를 먹고 출근하는 것도 당연지사다. “마감에 치이는 동료들에게 일을 넘기기 미안하다“며 꾸역꾸역 쳐낸다.
이직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를 묻자 허씨는 임파선염으로 마음고생했던 기억을 꺼냈다. 지난해 다녔던 회사는 업무량뿐만 아니라 권위적인 상사의 폭언 때문에 회사를 떠나는 동료가 많았다. 허씨도 같은 이유로 입사 한 달 만에 회사를 떠났다. 그는 “퇴사 후에야 목에 난 멍울을 살필 여유가 생겼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임파선염은 한 달 안에 치료됐지만, 가족력 때문에 받았던 갑상선암 검사에서 '이상 없음’ 소견을 들을 때까지 "이렇게 사는 게 맞나"라는 '현타(현실 자각 타임)'를 세게 맞았다고 했다.
허씨는 그러나 “이직을 하더라도 여건이 나아질지 확신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플 때 병가는커녕, 하루 연차라도 편히 쓸 수 있는 대한민국 직장인이 어디 있겠냐“고 되물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조치 해제 이후 다시 ‘아프면 쉴 권리’가 화두다. 정확히는 "겨우 시작된 권리 보장 논의가 시들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로 속 시끄럽다. 2020년 3월 질병관리본부(현 질병관리청)는 감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아파도 나온다’는 문화가 ‘아프면 쉰다’로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제서야 현행 노동관리법에는 코로나19처럼 업무를 원인으로 하지 않는 부상이나 질병으로 인한 휴가 규정이 없고, 사업주의 병가급여 지원이 의무가 아니라는 문제가 대두됐다.
법의 뒷받침이 없으니 팬데믹 때도 코로나19 확진자 3명 중 1명(34.3%)이 일했다. 직장갑질119와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지난해 6월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다. 감기·몸살 등 코로나19 유사 증상이 있는 2명 중 1명(49.9%)이 회사로 출근했다. ‘아프면 쉴 권리’가 기본권으로 인식되고, 2013년부터 잠자고 있던 상병수당제도가 시범사업이 된 것이 그나마 진전이다.
하지만 방역조치라는 최소한의 보호막이 이달 전면 해제되면서 노동 환경은 '아프면 나온다’로 퇴보하는 모양새다. 간헐적으로 재택근무를 하는 사무직 김혜인(가명·35)씨는 이달 초 코로나19에 확진돼 심한 목감기·몸살을 앓았지만 회사에 알리지 않고 집에서 일했다. 회사 정책(‘격리 권고기간 5일 동안 재택근무, 원할 경우 개인 연차 사용’)이 쉼을 보장해 주지 않기도 했지만, 대체인력 부족이 아파도 일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하필 김씨의 유일한 백업 인력은 장기 출장 중이었다. 김씨는 “회사에 알린다고 해서 쉴 수 있는 것도 아니잖나. 티 안 내고 조용히 일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허씨와 김씨는 ①업무주기가 짧아 업무량이 많은 편이고 ②그에 비해 인력이 부족하거나 ③업무 분화 정도가 심해서 대체인력을 찾기가 어렵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는 비단 두 사람만 겪는 문제가 아니다. 한인임 정책연구소 이음 이사가 이달 초 발표한 ‘LG유플러스 운영기술직군 직무스트레스 조사 결과’에서도 ‘동료가 힘들어지니까 미안해서’(50.9%), ‘내 업무가 너무 많아서’(27.6%) 등 인력 부족으로 인해 아파도 병가나 휴가를 낼 수 없다는 답변이 대다수였다.
아파도 출근하는 문화는 노동자 개인에게도, 공동체에도 이로울 리 없다. 개인 측면에서는 작은 병이 큰 병으로 악화할 위험이 있다. 앞선 조사에 수록된 현장 증언에서 황현철 희망연대본부 LG유플러스한마음지부장은 “주말 근무 중 몸에 이상을 느끼고 관리자에게 병원을 이유로 근무지 변경을 요청했으나 인원이 없다는 답변을 받고 업무를 강행하다 결국 쓰러져 뇌출혈 판정을 받은 사례가 있다”고 밝혔다. 허씨 역시 “입사 6개월 만에 퇴사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은 동료, 매일 토하다 퇴사한 주임, 과로하다가 유방암 3기 판정을 받은 대리 등 참다가 병증이 악화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고 말했다.
사회적 손실에 관한 연구는 일찍이 19년 전에 소개됐다. 2004년 10월 미국 하버드대 ‘비즈니스 리뷰’에는 “프레젠티즘(presentism)으로 인한 손실이 미국에서 연간 1,500억 달러(현재 가치로 약 192조 원)를 웃돈다는 연구가 실렸다. 프레젠티즘은 일을 못 할 정도로 아프지만 어떻게든 출근해서 버티는 상태를 뜻한다. 국내에선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8년 12월 “과로와 교대근무로 생긴 질병에 따른 사회적 부담이 연간 5조~7조 원에 달한다“는 유사 연구를 내놨다. 다만 프레젠티즘, 조기퇴직, 이직에 따른 생산성 손실 비용은 자료 한계로 분석하지 못했다고 했다.
우리 사회에서 아픈데 출근하는 직장인 비율은 50%를 웃돈다. 신희주 가톨릭대 교수는 올해 한국노동연구원 노동정책연구에 실린 보고서에서 “임금노동자 1,585명 중 50.5%가 지난 1년간 프레젠티즘을 경험했다”고 발표했다. 신 교수는 지난해 3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발표한 17.4%와 차이가 큰 이유에 대해 “병가에 대한 국가 간 통계, 서유럽 국가의 프레젠티즘 비율을 40~60%로 추산한 연구들을 고려하면 다소 낮게 추산된 것으로 추측된다”고 했다. 지난해 직장갑질119 조사에도 프레젠티즘 비율이 51.4%로 신 교수 분석에 근접했다.
아프면 쉬는 문화가 당연해지려면 병가휴가 사용을 의무화하는 등 제도 개선이 선행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여수진 민주노총 서울본부 노동법률지원센터 노무사는 “연차유급휴가든, 병가든 근로자들이 자유롭게 휴가를 쓰기 위해서는 회사가 적정 인력을 고용하고 업무를 배치해야 한다“며 “기업이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법제도 정립밖에 답이 없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최승현 노무법인 삶 대표는 “가족돌봄휴직처럼 가족이 아프면 간병을 위한 휴직을 보장해 주지만 정작 본인이 아플 때 쉼을 보장하는 법이 없다“고 아쉬워했다.
법제화까지 긴 시간이 걸리는 만큼 “회사 규정부터 아프면 쉴 권리를 적시해야 한다”(정우준 노동건강연대 활동가)는 의견도 있다. 국회가 병가의 법제화 논의를 시작한 것은 9년 전인 2014년 19대 국회 때부터다. 정 활동가는 “아프면 쉴 권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충분한 회복을 돕는, 적정임금을 보장하는 유급병가”라며 “재정 여력이 없는 작은 회사의 경우 정부가 유급병가를 쓸 수 있도록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