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단기간 내에 미국의 제재를 극복하고 반도체 분야에서 자립할 것이라고 보는 전문가는 드물다. 다만 정부의 전폭적 지원과 국민의 애국심을 등에 업은 중국 반도체 업체들의 와신상담이 이어진다면, 미국 규제가 닿지 않는 영역에서 한국 반도체 기업들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몇 가지 어려운 과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①중국의 추격을 뿌리치고 ②날로 험악해지는 국제정치 바람을 타는 반도체 산업의 불확실성을 극복하면서 ③반도체 주도권을 다시 가져오려는 미국의 이기주의도 이겨내야 한다. 미국·중국·일본·대만 등 주요국 정부들이 반도체를 핵심 전략산업으로 보고 과감한 지원을 하고 있는 만큼, 한국 정부도 기업과 발을 묶고 '이인삼각 원팀'으로 호흡을 맞춰야 한다는 조언이 많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반도체 투자 전문가 이병덕씨는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미국 규제 이후 중국의 반도체 자립 의지가 강력해지면서 중국의 반도체 기초 체력이 개선되고 있다"며 "첨단 분야에서 어려움을 겪는 반면 후방 분야에서 성과를 내다보니 국내 반도체 기업들과 겹치는 부분이 많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실제 중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최근 중국 기업들의 급격한 성장에 꽤나 당황하는 분위기다. 스마트폰의 두뇌인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첨단 메모리 반도체 등 핵심 부품에서는 여전히 해외 기업에 의존하고 있지만, 진입장벽이 낮은 부품과 장비 쪽에서는 자급화가 빠르게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병덕씨는 "한국도 2000~2010년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국내 부품 및 장비사들과 공동 개발하고 양산에 성공하면서 해외 업체와 경쟁할 수 있는 구도를 만들며 생태계가 성장한 것"이라고 과거의 경험을 돌이켰다. 그러면서 "중국도 중신궈지(SMIC), 화웨이 등이 이런 시도를 벌이면서 팹리스(설계)는 이미 한국이 뒤처졌고, 파운드리(위탁생산)의 경우 따라가기 힘든 상황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 반도체 투톱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력 사업인 메모리 분야의 경우 다행히 미국 규제 영향으로 중국 기업이 단기간에 추격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미국이 벌어준 시간을 토대로, 이참에 두 회사가 압도적 기술 격차를 벌려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다만 중국에 있는 두 회사의 메모리 공장이 문제다. 이 공장들 역시 미국의 규제 영향권에 있는데, 미국은 반도체 장비 규제를 시행하면서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 1년의 유예 기간을 줬다. 이대로 유예 조치가 끝날 경우 올해 10월 이후 중국 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공장에는 첨단 반도체 장비 진입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미국 정부는 자국 내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는 기업에게 보조금을 주면서 보조금을 받은 기업이 10년간 중국 등 우려 국가에서 반도체 생산능력을 '실질적으로 확장'하지 못하도록 제한했다. 그러면서 '실질적 확장'의 의미를 웨이퍼(반도체 원판) 투입 기준으로 첨단 반도체의 경우 '5% 이상'이라고 제시했다.
황철성 서울대 석좌교수(재료공학부)는 "삼성의 시안(西安) 공장의 경우 지난 10년간 웨이퍼 투입량이 110% 이상 증가했다"며 "10년간 5% 미만을 증산하라는 건 더 이상 중국에서 최첨단 메모리 공장을 운영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황 교수는 제조 기술의 혁신을 통해 규제 한도 내에서도 생산량 증가를 할 방안도 가능하나, 이 역시 차세대 공정 장비가 도입돼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결국 정부가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장비 규제 유예 연장'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와 함께 중국의 추격이 예상되는 분야에 대해선 집중적인 생태계 지원이 필요하다는 조언이 더해진다. 실제 국내에선 10나노미터(㎚·1nm=10억 분의 1m) 이하 첨단 공정 중심으로 삼성전자 파운드리 공장이 운영되다 보니 구형 제품을 생산하는 중소 반도체 팹리스 기업들은 국내에서 반도체 제조를 하지 못하고 중국이나 대만의 파운드리 기업에 의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들은 시장 상황에 따라 필요한 만큼 주문을 넣지 못할 뿐 아니라 제조 현장에 발 빠르게 대응도 어렵다고 호소한다.
이병인 한중시스템IC 협력연구원장은 "첨단 공정 경쟁뿐 아니라 성숙 공정의 제품들도 지속적으로 지원해 국내 풀뿌리 팹리스들의 체력을 키워야 한다"며 "이런 중소 기업들이 생존하고 상품 경쟁력을 유지해야만 향후 중국과의 디커플링(탈동조화)이 심화되었을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재 양성 부분에선 오히려 중국을 배워야 한다는 조언도 나왔다. 중국 정부는 반도체 산업에서 필요한 인력 규모가 충분치 않다는 인식에 2020년 '반도체 학과 및 공정' 관련 학과를 최상위인 1급 학과로 승급하면서 지원을 대폭 강화했다. 이후 중국 최대 파운드리 기업인 SMIC와 산학협력을 통한 실전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난징반도체대학을 설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광둥공업대, 안후이대, 선전기술대, 칭화대, 베이징대 등 14개 거점 대학에서 반도체 학과가 신설됐다.
이혁재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중국은 반도체 대학을 만들고 있는데 우리는 과 하나 만드는데도 여러 난관에 부딪힌다"며 "정부가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밀고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