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건강검진을 했다. 많은 사람이 대장내시경을 하기 위해 설사약 먹는 것을 아주 힘들어한다지만, 나는 그 시간을 경건하게 받아들인다. 내 안에 쌓인 찌꺼기들을 비워내고 초기화하는 기분이다. 수면내시경을 하면서 즐기는 까무러치는 수면 시간도 좋다. 몇몇 연예인들이나 고위층 사람들이 프로포폴 주사에 중독됐다는 뉴스도 조금은 이해가 가는 면이 있다. 내시경을 아주 잘하고 많이 하는 어떤 선생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선생님은 누구에게 내시경을 받는지요? 돌아온 답은 놀라웠다. 여태 한 번도 내시경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 의사들이 이렇게나 담대하다.
검진 결과를 받아 들고는 죽비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러 가지 병들이 시작되고 있었다. 급성기 치료를 해야 하는 병도 있어서 약을 수북이 처방받았다. 아침에 일곱 알의 약을 먹는데, 간식으로 먹어도 배가 든든할 정도다. 한번 빌려 쓰는 내 몸에, 탐욕과 무절제로 큰 죄를 짓고 있었다. 그래서 다짐했다. 이번 기회에 술을 끊어버리기로.
우선, 노란색 메신저에서, 연인들이 시작한다는 '오늘부터 1일' 느낌의 스티커 앱을 활성화했다. 오늘은 단주 20일째다. 20여 년을 술자리를 마다하지 않고 살았다. 내 몸에 흡수된 술은 간에서 아세트알데하이드로 분해된다. 이 물질은 분해 효소를 통해 무독성의 아세트산으로 분해되어 체외로 배출된다. 나는 이 아세트알데하이드 분해 효소가 부족해서 안면 홍조가 쉽게 생겼다. 혈중에 쌓인 아세트알데하이드의 독성 작용이다. 이 독성 물질은 발암 물질이다.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는 이것을 1급 발암 물질로 분류했다. 1급 발암 물질은 사람에게 암을 일으킨다는 것이 확실한 물질로 석면, 벤젠, 담배 등이 포함된다. 이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나, 술 권하는 사회에서는 이 엄연한 사실을 덮어두는 것이 대인배의 미덕이다. 놀랍게도 우리의 술자리에서는 발암 물질을 먹는 이유가 아니라 먹지 않는 이유를 추궁당한다. 화재 앞의 소방관에게 왜 불을 끄려고 하냐고 묻는 것과 같다.
김영하 작가는 어떤 예능 방송에서 '쓸데없는 술자리의 시간으로 젊은 날을 너무 낭비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술을 며칠 안 먹어 보니 100% 공감이 가는 말이다. 맨 정신으로 회식에 참석하다 보면 술을 먹고 즐기는 사람들이 매우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술자리를 하면 그 자리에서는 형님, 아우 하면서 친해지지만, 바로 다음 날부터는 다시 어색해지는 경험을 많이 했다. 술을 먹고 나눈 말들은 술이 깬 다음 잘 기억이 안 나고, 그중에 기억이 나는 말들이라고는 돌이켜보면 다 헛소리들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술자리를 통한 화합이라는 것은, 서로의 취약성을 나누는 시간일지 모른다. 물론 취약성 공유 조직 문화는 구성원들이 자신의 약점과 실수를 공개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문화로, 서로 신뢰하고 지원할 수 있도록 하며, 조직의 창의성과 혁신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맑은 정신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다는 것은 그 조직이 안전한 환경이 전혀 아니라는 뜻이다. 더 건강하고 온전한 정신으로 세상을 더 이롭게 하고 싶은 사람은 술을 끊고, 술을 먹는 사람에게는 이 이유를 끝까지 추궁하자. 술은 1급 발암 물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