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저녁 8시.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인근 경의선 책거리 광장에 갑자기 일본어 노래가 울려 퍼졌다. 음악에 맞춰 흰색 블라우스에 검정 치마를 입은 여성 청소년 서너 명이 똑같은 춤을 추며 동영상 플랫폼 ‘틱톡’을 찍었다. 바로 옆엔 비슷한 차림의 다른 청소년 무리가 전자담배로 흡연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진하게 화장했지만 자세히 보면 앳된 얼굴이다.
뭔가 수상한 모습의 이들은 이른바 ‘멘헤라 문화'를 추구하는 청소년들이다. 멘헤라는 ‘정신건강(Mental Health)이 좋지 않아 보이는 사람’을 일컫는 일본식 신조어. 가정폭력, 집단 괴롭힘 등 어두운 과거 탓에 자기 파괴적 행동을 일삼고, 타인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특성을 가진 집단으로 여겨진다.
멘헤라는 일본에서 시작돼 한국으로 흘러온 문화인데,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들을 악용하려는 일부 성인이 '멘헤라 청소년'을 범죄 타깃으로 삼기도 한다. 최근 성착취 등 큰 논란을 일으킨 ‘우울증 갤러리'(울갤) 등 온라인 커뮤니티엔 “애정 결핍이 심한 미소녀 멘헤라 만나고 싶다”와 같은 글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실제 이날 만난 멘헤라 청소년 중 절반도 울갤 회원이었다. 경의선 책거리가 집결지가 된 건 인근 홍대에서 일본식 코스프레(만화나 게임 의상을 입고 모여 노는 것) 문화가 발달한 영향으로 보인다. 근처에서 주류점을 하는 최지훈(38)씨는 “어린 학생 수십 명이 같은 복장으로 춤추고 담배를 피우기에 그러잖아도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던 중”이라고 말했다.
청소년들이 광장에 모여 자기만의 문화를 누리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큰소리로 떠들고 노래 불러 소음을 유발한다는 민원이 있긴 하지만, 이들이 주변 상인이나 시민들에게 직접적인 불편을 끼치는 일은 거의 없다.
문제는 우울증을 방치하거나 때때로 부추기기까지 하는 멘헤라 문화가 언제든 사고나 형사사건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 18일엔 이곳에서 ‘멘헤라 여성 청소년’ 두 명이 자해해 경찰이 출동했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목격한 최모(19)씨는 "서너 명 정도가 모여 있다 갑자기 바닥에 피가 고였다”고 했다. 이 공원을 자주 찾는다는 이모(12)양은 “다른 친구들도 종종 여기서 자해를 한다”고 전했다. 자해 청소년들은 경찰 조사 후 보호자에게 인계 조치됐다.
지금 멘헤라 현상은 일부 청소년들에게만 해당되지만, 이를 방치하면 일본의 ‘토요코 키즈’와 같은 사회 문제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토요코 키즈는 일본 대표 번화가인 가부키초나 도호, 시네마즈 옆에서 무리를 지어 노숙하는 가출 청소년들을 말한다. 상당수가 멘헤라 청소년들인데, 이들이 성매매 등 각종 범죄에 노출된 사례가 일본에서도 큰 사회 문제가 된 적이 있다. 김효진 서울대 일본연구소 조교수는 “감정적으로 섬세한 아이들에게 정신 질환을 일종의 ‘콘셉트’로 인정하는 문화가 해방감을 준 것 같다”며 “지금이라도 아이들이 왜 이런 문화에 빠졌는지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