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서 먹을거리를 훔치다 온 중년 남자는 건초 같았다. 심하게 말랐고 병색이 완연했다. 처벌은커녕 건강이 걱정되어 이것저것 물었다. 위암 수술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혼자 살면서 기초수급금으로 겨우 버틴다고 했다. 말투나 눈빛에서 삶에 대한 피로가 뚝뚝 묻어났다. 아직 젊으니 마음 단단히 먹고 건강에 신경 쓰라고, 혼자 감당하기 버거우면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라고 당부했다. 그러자 남자는, 이번에 경찰서에 간 김에 사정 얘기를 했더니 어디서 반찬을 지원해 주더라며 피식 웃었다. 남자의 미소가 반찬에 어울리지 않게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찬이 아니라 세상의 드문 호의에 대한 미소일 거라 짐작했다. 남자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임대차계약서, 소득재산신고서, 월급명세서, 고용확인서, 근로능력평가용 진단서, 통장거래내역서(1년 치)… 행정복지센터 홈페이지에 소개된 기초생활보장수급자 신청에 필요한 서류들이다. 몸이 아파 거동이 불편하고,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들이 이런저런 서류를 떼고 복지센터에 들르거나 인터넷에 접속해 일을 처리할 수 있을까. 사람이 궁핍한 상황에 빠지면 심리적으로 엄청나게 위축되는데, 가난을 품 안 가득 안고 다니며 펼쳐 놓고 떠벌리고 싶을까. 가난은 어쩔 수 없다 쳐도 관료주의나 행정편의주의가 사람을 죽이는 건 참기 어렵다. 우리만의 문제도 아니다. 심장질환으로 실직한 다니엘 블레이크는 질병수당을 받지 못해 구직수당을 신청하지만, 구직수당을 받으려면 규정상 구직활동을 해야 한다. 다니엘은 컴퓨터에 서툰 탓에 구직활동을 증명할 수 없어 구직수당마저 끊긴 채 죽어간다(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남자친구의 폭력으로 20대 싱글맘이 되어 근근이 버티는 스테퍼니 랜드 같은 저소득층도 그들에게 꼭 필요한 푸드 스탬프(식료품 구매권)를 받으려면 먼저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의무화해 놓은 법이 미국에 있다. 어렵게 취직해 푸드 스탬프로 결제하려는 스테퍼니의 면전에다 대고 물건값을 대신 계산해 주기라도 한 양 "고맙단 말은 안 해도 돼!"라고 모욕하는 노인도 있다(책 '조용한 희망'). 도대체 언제까지 반년 전에 고독사한 독거노인과 중년 남자와 최고은 작가와 송파구 세 모녀와 또 다른 모녀의 뉴스를 들어야만 하는가.
가난은 합리적 의심을 넘어 증명되어야 하는가. 깡마른 몸과 허기와 굴욕으로 흔들리는 눈빛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범죄경력이나 납세실적처럼 간단한 조회 정도로 확인할 순 없을까. 당장 사람부터 살려놓고 혹시 요건에 미치지 못함이 밝혀지면 나중에 구상하면 안 될까. 긴급히 도움을 요청함에도 요건 불비로 거절하거나 미뤄도 되는 가난이라는 게 대체 있기나 한가.
송나라 범문정공이 태수로 있을 때 술자리를 열려다 우연히 준비가 전혀 안 된 선비의 장례를 목격하고, 술자리를 물리고 후한 부의로 장례를 치르게 했다는 일화에 대해 정선은 "선행을 저해하는 부류가 있으니 상사(喪事)를 도와주는 것을 보면 산 사람이 먹고사는 것이 중요하다 하고, 남을 구제하는 것을 보면 궁한 친척을 구휼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한다. 친척을 친척으로 대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반드시 한 가지 일이 끝나야 다른 한 가지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평했다. 다산은 이 말을 받아 '혹시 비참한 일이 눈에 띄어 측은한 마음을 견딜 수 없거든 주저하지 말고 즉시 구휼을 베푸는 게 마땅하다'고 목민심서에 썼다. 어떤 산이 명산인가. 가까운 산이다. 어떤 사랑이 최고인가. 지금 당장 하는 사랑이다. 구휼도 같다. 건초 같은 남자에게는 형사처벌이 아니라 도움이 절실하다. 사회복지는 공적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사적 사랑이 끝나면 공적 사랑이 신속하게 이어져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