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병맥주 1병의 자양 량은 우육 반근과 같다."
1930년 맥주 광고 카피는 이랬다. 그야말로 과장 광고인 셈인데, 그 당시 술에 부여된 중요한 가치가 자양과 영양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연말연시 최고의 선물용으로도 홍보된 맥주는 큰 사랑을 받았다. 국내 맥주 소비량을 보면 알 수 있다. 1923년 약 112만8,000병이던 것이 1933년 무려 1,254만 병으로 증가했다.
특히 경성의 '모던뽀이'들에겐 인기만점. 1939년 경성역 플랫폼엔 '삐루-스탠드'가 생기기도 했다. 말 그대로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 "주당에게 귀염밧는(사랑받는) 경성역 신명물"이었다나. 삿포로와 아사히 맥주를 '조선산의 대표품'으로 광고한 기록에선 서글퍼질 수밖에 없다. 일제가 일컫는 '국산'이 진정한 국산이 아니었고, 일제가 부르는 '조선제'도 진정한 조선제는 아닌 게 많던 시절이다.
맥주는 신간 '경성 백화점 상품 박물지'에 담긴 130여 개의 상품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미지만 700여 장에 집필까지 걸린 시간은 약 2년. 미술사학자이자 국내에서 찾기 힘든 근대 건축 실내 재현 전문가인 저자의 집념이 책에 담겼다. 비누 같은 생필품부터 귀금속까지 물품들의 내력이 빼곡히 적혔는데 현재 우리 삶을 비추어 보면 더욱 흥미롭다. 1920년대 경성 모던걸들이 사랑한 베레모를 보면 '유행은 돌고 도는구나' 새삼 깨닫고, 1937년 신문 광고 속 "제일 고급이라고 하는 샤넬의 제오번(No.5 향수로 추정)이 일백삼십 원"(당시 쌀 한 가마니는 20원으로 오늘날 물가로 치면 대략 130만 원 상당) 문구를 보면, '이때도 샤넬이?' 싶어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