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 장르소설 작가 정보라(47), 김보영(48)이 연작소설로 돌아왔다. 각각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2022)과 미국 전미도서상 번역서부문(2021) 후보에 오르며 한국 문학의 매력을 세계 문단에 보여줬던 이들이다. 이번 신간에서 두 작가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은 생동하는 사물 너머의 세계였다. 지난해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끝내주게 무서운 공포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던 정보라는 영혼이 깃든 물건을 소재로 진짜 귀신 이야기를 냈다. 그런가 하면 김보영은 스물다섯에 썼던 로봇 이야기의 후속작을 새롭게 썼다. 23년이란 세월 동안 작가의 관점 변화를 고스란히 담은 책이다.
정보라의 '한밤의 시간표'는 수상한 연구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7편을 묶었다. 한밤의 시간표에 따라 야간 순찰을 하는 직원들. 정해진 순서대로 각 방을 돌며 잠긴 문을 확인한다. 어려울 것 없어 보이지만 특이한 안전수칙이 있다. 근무시간에 휴대폰은 꺼둬야 하고 방문을 절대 열지 말아야 하며 말도 안 되는 것을 보더라도 "그냥 없는 척, 모르는 척"하는 게 수칙이다. 이를 어기면 벌어지는 일들과 직원 사이에 전해지는 괴담 등을 통해 이 연구소의 정체가 드러난다. 영혼이 깃든 물건이 보관된 방의 문을 열면 그 귀신에 홀릴 수 있다는 것.
첫 수록작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부터 뒤를 돌아보기 힘든 오싹함을 선사한다. 지하주차장 출입문을 막아서고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정체불명의 남자.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주차장으로 들어가 오토바이를 타고 나간 '찬'은 출구 없는 터널에 빠진다. 구조 요청을 위해 찾은 비상 전화 수화기에서 "관 배송일은 언제로 할까요?" "사망하실 예정 아닙니까?"라는 말을 듣는 찬을 보며, 어두운 터널 속에서 한번쯤 느껴봤을 공포감이 극대화된다.
이야기들은 부조리에 대한 정보라식의 날카로운 통찰이 곳곳에서 빛난다. '양의 침묵'은 도박에 빠진 남편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고양이는 왜'는 이별을 통보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한 여성의 억울함을 담았다. 환영의 공포에 섬뜩한 현실이 겹쳐 보인다. 동시에 인간은 물론 인간이 아닌 존재까지 품는 온기가 작품 전체를 감싼다. 스산하지만 결국은 길 잃은 혼들이 제 길을 찾아가도록 돕는 공간(연구소)이라서다.
'종의 기원담'은 로봇 '케이'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 3편이다. 1, 2편은 김보영의 초기 작품인 종의 기원' '종의 기원: 그 후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개고해 제목을 '종의 기원담'으로 바꾼 단편이다. 이들 작품이 수록된 영문판 소설집이 한국 SF 최초로 전미도서상 후보에 오른 것을 계기로, 올해 작가가 새롭게 쓴 후속(3편) '종의 기원담: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와 함께 재출간됐다.
소설은 로봇만이 존재하는 세계를 그린다. 잔병을 일으키는 흙과 산소는 유해물질로 구분되는 세상이다. 유기 생물학을 연구하는 로봇 케이가 내놓은 새 이론이 모든 서사의 발단이다. 식물과 같은 '유기생물'은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순환을 통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 생물은 "자신의 의지가 있어야 하고, 전기 에너지를 이용해야 하며, 칩이 있어야 하고, 공장에서 만들어져야 한다"고 규정하는 세계에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세계관 전환인 셈이다.
연작소설은 그 전환과 이후 약 70년의 역사를 다룬다. 1편이 그 발견을, 2편은 실제 케이와 동료로봇들이 식물에서 시작해 인간까지 재탄생시킨 후 벌어지는 암울한 상황을 보여준다. 작가가 가장 최근에 쓴 3편에서는 인간을 숭배하는 로봇과 파괴하는 로봇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 그리고 인간과 로봇의 공존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담았다. 이 작품을 "무기생명에 대한 내 개인적인 헌사며…사물에 깃든 생명에 바치는 경애"라고 밝힌 작가의 말을 곱씹으며 읽을 때 신선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인간과 비인간을 오가는 시선의 교차점에서 세계 생명 근원에 대한 철학적 사유, 종교의 의미, 동시대의 사회·환경 문제 등을 성찰할 시간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