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반도체기업 브로드컴이 삼성전자에 갑질한 혐의와 관련해 제시한 '셀프 구제안'을 공정거래위원회가 퇴짜 놓았다. 브로드컴 스스로 갑질 행위를 책임진다면서 정작 피해 기업인 삼성전자를 향한 보상은 외면했기 때문이다. 당초 브로드컴과 같이 구제안을 만들었던 공정위의 결론 뒤집기도 도마에 오른다.
공정위는 7일 열린 전원회의에서 브로드컴의 거래상 지위 남용 건에 대한 최종 동의의결안을 기각했다고 13일 밝혔다. 브로드컴이 삼성전자 갑질을 놓고 공정위 제재를 피하는 대신 마련한 피해 구제 등 자진 시정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공정위가 동의의결 제도를 도입한 2011년 이후 자진 시정안을 기각한 건 처음이다.
브로드컴은 와이파이 등 스마트폰 필수 부품을 삼성전자에 납품하면서 3년 장기계약(2021~2023년)을 강요했다. 계약 기간 삼성전자는 매년 7억6,000만 달러 이상의 부품을 구매하지 않으면 차액만큼 브로드컴에 물어줘야 하는 불공정 거래였다. 공정위는 미국 정보통신업계 라이벌 퀄컴의 신고로 브로드컴 조사에 착수했다.
공정위는 조사 진행 도중 지난해 8월 브로드컴 신청을 수용해 동의의결 절차를 개시했다. 이후 검찰 격인 공정위 심사관과 브로드컴이 협의해, 반도체 중소기업·인력 양성 상생기금 200억 원 조성을 골자로 한 자진 시정안을 올해 1월 내놓았다.
하지만 브로드컴 자진 시정안을 최종 심의한 공정위 전원회의(법원 1심 격) 판단은 달랐다. 전원회의는 자진 시정안이 "다른 사업자 보호에 적절하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삼성전자 피해 보상 방안이 빠진 자진 시정안은 '속 빈 강정'이란 뜻이다. 피해액이 4,000억 원 규모라며 자진 시정안에 강력 반발한 삼성전자, 보상금을 한 푼도 내주기 어렵다는 브로드컴 입장도 이번 결정에 반영됐다.
공정위는 곧바로 브로드컴 제재 심의에 착수해 연말까지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브로드컴 사건이 과징금을 부과받으면, 삼성전자는 피해 보상을 위한 민사 소송에서 유리해질 가능성이 크다. 위법 여부를 따지지 않는 자진 시정안과 달리 과징금은 브로드컴의 법 위반 행위를 공식 인증한 제재이기 때문이다.
브로드컴 사건을 심의한 공정위의 오판 논란도 제기된다. 심사관과 전원회의 판단이 엇갈릴 순 있지만, 자진 시정안 마련 과정에서 공정위가 삼성전자 보상책을 관철시키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공정위 관계자는 "심사관 쪽에선 자진 시정안을 마련하면서 브로드컴 동의도 받아야 해 수동적 입장이었다고 한다"며 "다만 동의의결 절차를 개시하더라도 불충분한 자진 시정안이 기각될 수 있다고 보여준 점은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브로드컴은 공정위 결정에 반발했다. 과징금 부과 시 불복 소송도 예상된다. 브로드컴 측은 "공정위와 상당 기간 논의 과정을 거친 후 합의한 자진 시정안을 승인하지 않은 데 대해 유감을 표한다"며 "(제재 심의에서) 자사 입장이 관철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