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역전세는 74조원 ‘곗돈’ 위기다

입력
2023.06.12 17:00
26면
전세는 契처럼 약자가 강자에 돈 맡겨
떼일 위험 크고, 금융 부실 확산 가능성
다주택자 줄여, 전세 제도권 흡수해야

한국은행이 지난 8일 내놓은 깡통전세와 역전세의 위험성 분석 보고서를 찬찬히 읽다 보니, 웬만한 공포 소설보다 더 으스스하다. 깡통전세는 전셋값이 집값보다 비싼 주택, 역전세는 기존 전세보증금이 최근 전세시세보다 비싼 주택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4월 기준 깡통전세는 16만 3,000호로 전체의 8.3%까지 늘어났고, 깡통전세당 평균 2,000만 원 정도 집값이 전셋값보다 쌌다. 역전세는 102만6,000호로 전체 전세의 52.4%까지 늘어났다. 역전세 액수는 주택당 평균 7,000만 원에 달한다. 이렇게 구체적 통계가 구해진 것은 2021년 시행된 전월세신고제 때문이다.

신고된 계약을 토대로 전국 전세 부실 규모를 계산하면 깡통전세가 3조 원, 역전세는 71조 원에 달한다. 여기에 신고 계약의 3분의 1가량 되는 미신고 계약까지 고려하면 그 규모는 더 늘어난다. 전세는 계약상 약자가 강자에게 돈을 맡긴다(대여)는 점에서 ‘계’와 같은 구조의 사채다. 계주가 곗돈을 들고 도망가면 계원은 속수무책인 것처럼 전세도 집주인이 보증금을 못 돌려주더라도 세입자는 대책이 별로 없다. 또 집주인 손에 큰돈이 쥐어지기 때문에 집주인은 집을 더 구입하는 등 투기에 나서기 십상이다. 이는 집값과 거래 변동성을 높이고 결국 과잉 대출을 일으켜 금융시장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전세시장은 집값이 하락하지 않아야만 순탄하게 유지된다. 그렇게 위험한 전세시장에서 돌려받기 어려운 전세보증금(곗돈)이 무려 74조 원까지 늘어난 것이다.

전셋값이 정점을 찍던 2021년 하반기 계약했던 전세 주택이 올 하반기에 시장에 쏟아져 나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찔하다. 전세 대출을 받은 세입자가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해 대출금을 제때 갚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위기는 금융기관으로 확산할 것이다. 또 집주인이 전세금 상환을 위해 한꺼번에 주택 매각에 나설 경우 집값 폭락을 부를 수 있다.

이런 위험성 때문에 전세는 우리나라 말고는 금융시스템이 빈약한 인도 볼리비아 정도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국내 전세가 모기지론(장기상환 주택대출)에 자리를 내줄 것으로 예상했다. 역대 정부도 여러 차례 다주택자 중과세나 임대주택 보급 확대 등으로 전세 수요를 제도권 금융으로 전환하려 했다. 하지만 매번 다주택자와, 월세보다 주거비가 싼 전세를 선호하는 임차인의 저항에 부딪쳐 제자리걸음이다.

그사이 전세보증금이라는 사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22년 말 기준 전세보증금은 1,058조 원으로 5년 만에 38% 늘었다. 금융권 가계대출의 58% 규모의 사채가 제도권 밖에 숨어 있는 것이다. 이를 합치면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56.8%로 스위스(131.6%)를 제치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가 된다. 전세보증금은 언제든 금융위기를 부를 수 있는 초대형 폭탄이며, 그 뇌관이 깡통전세와 역전세다.

정부가 가계부채 안정화 최후 보루로 여겨온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한도마저 전세금 반환이 어려운 집주인에게는 완화하기로 한 것도 이런 위기감 때문이다. 다만 갭투자로 깡통전세를 양산한 투기꾼에게 퇴로를 열어준다는 비판을 고려해 주택가격과 주택 수 등에 따라 DSR 완화에 제한을 두려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그치지 말고 이번 사태가 전세시장을 축소하는 계기가 되도록 적극적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다주택자에 대한 보유세 혜택을 중단하고, 양도세 중과는 면제해 점진적인 주택 매도를 유도해야 한다. 동시에 금융기관들은 전세가 아니더라도 편안하게 살 집과 내 집 마련 디딤돌을 동시에 충족할 금융 상품을 개발해 전세보증금을 제도권으로 흡수해야 한다.

정영오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