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원료는 규소(실리콘)다. 반도체 원판인 웨이퍼 자체가 순도 100%에 가까운 실리콘 덩어리다. 그런데 실리콘은 사실 지구 표면에서 산소 다음으로 많은, 매우 흔한 물질이다. 모래나 흙 등의 주성분이 모두 실리콘이다. 그 흔한 물질로써 21세기 기술의 총아 첨단 반도체를 만드는 것이다. 반도체를 '마법의 모래'라 비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늘 발에 채이듯 흔하지만, 누구나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은 이 '마법의 모래'를 둘러싼 국제전이 점입가경이다. 전쟁의 주요 주체는 미국, 중국, 한국, 대만 일본. 이 전쟁의 끝에 21세기 산업 패권의 주도권을 보장하는 '절대반지'가 놓여 있다. 바로 이 반도체 전쟁을 다룬 '바이블' 같은 책이 있는데, 바로 크리스 밀러(Chris Miller) 미국 터프츠대 플레처스쿨 교수가 집필한 논픽션 '칩 워'(Chip war)다.
이 책은 그동안 주로 산업 측면에서만 다뤄졌던 70여 년간의 반도체 개발의 역사를 마치 전쟁사처럼 풀어나간다. 하버드대와 예일대에서 역사를 전공한 밀러 교수의 남다른 식견과 오랜 취재 덕이다. 32주 연속 미국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고, 지난해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올해의 책'에 선정됐다. 밀러 교수는 현재 미국 외교정책연구소(FPRI) 유라시아 프로그램 국장을 겸임하고 있으며 미중 반도체 전쟁을 비롯해 러시아, 중국의 정치·경제 등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한국일보는 창간기획 '중국 반도체 굴기의 현주소'를 마무리하면서 밀러 교수와 화상 및 이메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밀러 교수는 "중국 반도체 산업의 가장 큰 장점은 중국이 세계 최대의 전자제품 조립업자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다는 것"이라면서도 "기술적 성취나 공급망의 중요성 측면에서는 중국은 '단순 참여자'일 뿐 결정적인 주체는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이어 "중국이 반도체 공급망의 어떤 분야에서든지 글로벌 리더로 올라서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고 강조했다.
밀러 교수는 중국에서 반도체가 가지는 '정치적 함의'를 먼저 강조했다. 중국이 반도체에 집착하는 이유에는 산업적인 측면 말고도 정치적인 목적이 있다는 얘기다. 중국 정부는 권위주의 통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정보통신(IT) 기술을 국민에 대한 통제와 감시에 활용했다. 그 결과 인공지능(AI)과 독재를 결합한 21세기식 '혼종'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막상 이 감시시스템은 외국산 반도체가 없으며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설비였다. 그래서 '반도체 굴기'에는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이 화웨이 통신장비 사용을 금지하듯, 중국도 반도체 생산을 더이상 해외기업에 맡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밀러 교수는 "중국의 모든 중요 기술은 언제 깨질지 모르는 외국산 실리콘 위에 서 있었다"며 "중국 지도자들에게 반도체 해외 의존 문제는 단순히 공급망 불안정을 피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밀러 교수는 그런 점에서 반도체 패권 전쟁의 신호탄은 중국이 쏘아올렸다고 주장한다. 기존 반도체 공급망에 균열을 내고 싶은 중국과, 중국의 거대한 시장을 잃지 않으면서도 중국의 성장을 막아야 하는 미국·일본·대만·한국 등의 국가간 힘싸움이라는 해석이다. 그는 "서방의 지도자들은 현 상황에 금이 가 중국 시장 접근이 제한되는 상황을 원하지 않는다"며 "서방의 대중 제재가 스마트폰과 컴퓨터(PC) 등 소비자 기기가 아닌 그래픽카드(GPU)와 AI 반도체를 중심으로 굉장히 제한적으로 이뤄지는 이유"라고 말했다.
기술을 통제해 중국 반도체 산업의 성장을 막겠다는 것이 서방세계의 복안이라면, 중국은 '세계 최대 내수시장'을 볼모로 어떻게든 외국 회사로부터 첨단부품과 장비, 기술을 빼오기 위해 압박하는 형세다. 최근 중국 정부의 마이크론 제재에도 국내시장을 쉽게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셈이다.
밀러 교수는 "중국 제조업체들이 국내 시장을 독식할 수 있도록 중국 정부가 산업 재편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며 "대만, 한국,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을 점차 줄이면서 반도체·전자산업에서 더더욱 보호주의적인 경향을 띌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어 "중국 정부의 정책이 성공할수록 외국 기업들의 판매량과 매출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밀러 교수는 중국 반도체 굴기의 성과를 어느정도 인정하면서도, 중국이 반도체 산업의 패권 국가가 되긴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돈을 좇는다면 불가능할 것이 없는 자본주의, '자강'이라는 미명 아래 스스로 고립의 길을 택한 공산주의의 태생적 차이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다.
밀러 교수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기술 라이센싱 등 교류와 분업을 통해 적극적으로 공급망에 편입하면서 단기간에 주요 플레이어로 성장한 TSMC, 삼성전자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며 "고도하게 전문화된 반도체 공급망 속에서 장비·디자인·소프트웨어 생산에 수반되는 복잡성은 기술강국들과의 교류 없인 따라잡을 수 없는 영역"이라고 진단했다. 중국의 장기인 '단시간 대규모 자본 투자'가 반도체에선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는 이어 "굴기의 성공 여부는 미국, 일본, 네덜란드의 수출 통제 정도에 따라 좌우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중국이 반도체 굴기를 밀어붙이고 대만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이어나가는 한 서방의 제재는 계속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중국이 기초과학 투자를 늘리는 등 장기적 전략으로 전환한 것에 대해서도 그는 "산업적 성공과 기초과학에서의 성과는 별개"라며 선을 그었다. 밀러 교수는 "중국 과학자들이 많은 분야에서 훌륭한 논문을 발표하고 잇지만, 정작 중국 기업들은 해당 분야에서 1위를 하지 못하고 있다"며 "중국 정부의 보호주의 성향은 오히려 중국 반도체 기업들의 경쟁력을 키우는데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한국 반도체 산업의 활로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밀러 교수가 준 힌트는 결국 '돈을 좇으라'는 것이었다. 한국이 반도체 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해줬던 과거의 방식을 앞으로도 견지하라는 뜻이다.
밀러 교수는 "미국의 수출통제 조치는 중국 기업을 타깃으로 한 것"라며 "미국 반도체지원법(CHIPS Act)의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이 한국에 미쳤거나, 앞으로 미칠 여파는 상당히 과장돼 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그는 "불확실성 탓에 한국 기업들에게도 중국은 매력적인 투자처는 아니었을 것"이라며 "한국 기업들은 이미 미국 정부의 보조금, 전자 산업 전반의 '탈중국' 현상 등 지정학적 상황과 여러 옵션을 평가해 합리적인 사업적 판단을 내리고 있을 것"이라고 신뢰감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