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시대, 그림 그리는 직업은 없어질까?

입력
2023.06.13 05:30
18면
<23> 인공지능 시대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편집자주

아무리 유명한 예술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미술 관련 진로상담을 하면서 많이 들었던 질문이 있다. “그림 그려서 먹고살 수 있나요?”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냐는 질문이다. 당연한 궁금증이다. 최근에는 새로운 질문이 추가되었다. “인공지능 시대인데, 그림 그리는 직업이 없어지는 거 아닌가요?” 마땅히 해야 할 질문이다. 이번 이야기는 그 당연하고 마땅한 질문에 대한 내 나름의 응답이다. 이야기는 최근 나의 눈길을 끌었던 두 가지 뉴스에서부터 시작된다.


애플의 비전 프로, 한국형 판타지 게임 ‘눈마새’, 그리고 이안 매케이그

며칠 전 공개된 애플 사의 ‘비전 프로’ 소식이 화제다. ‘비전 프로’는 스키 고글과 비슷한 형태로 머리에 착용한 후 눈과 손가락의 움직임만으로 작동되는 일종의 ‘착용형 컴퓨터’다. 가격, 배터리 시간 문제, 무게감 등의 단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들이 보완되고 실용화 단계로 들어선다면 어떻게 될까? 아이폰을 시작으로 스마트 기술이 정착되었듯, ‘비전 프로’와 같은 공간형 컴퓨터가 정착된다면 앞으로 TV 모니터, 스크린 등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디지털 기기의 일상화로 아날로그 기기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요즘 풍경을 불과 30년 전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것처럼, 급격한 속도로 성장 중인 인공지능(AI) 기술과 증강·가상 현실 기술이 상용화 단계로 들어선다면 인간의 사고, 철학, 문화도 변화할 것이다.


나의 눈길을 끌었던 또 다른 뉴스는 국내 게임회사 ‘크래프톤’의 게임 개발 소식이다. 배틀그라운드(일명 배그)로 큰 성공을 거두었던 크래프톤은 2년 전 이영도 작가의 판타지 소설 '눈물을 마시는 새' IP(지식재산권)를 기반으로 하는 게임 개발을 발표했다. 작년에는 그간 준비했던 비주얼 R&D(연구개발)의 결과물도 공개했다. ‘눈물을 마시는 새’는 한국판 ‘반지의 제왕’으로 불리며 한국적 색채가 강한 세계관을 담고 있다. 크래프톤 측은 이 소설을 세계적인 콘셉트 아티스트 이안 매케이그에게 보내며 협업을 타진했는데, 이안은 “이 소설에 광적으로 빠져버렸고 최소 서너 번은 완독했다”면서 작업을 수락했다. 이안 매케이그. 내가 특별히 기억하는 이름이다. 20년 전인 2003년, 디자인 전문지 기자였던 나는 동료 선배 기자가 진행하는 이안 매케이그의 인터뷰에 업무지원을 했다. 스타워즈,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어벤저스 등 우리를 신비의 세계로 이끌었던 그 비주얼을 설계한 사람이 바로 이안 매케이그다.






비주얼 디벨롭먼트 아티스트를 아십니까?

1957년 미국에서 태어난 이안 매케이그는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예술학교를 다니던 중 잠시 미국 캘리포니아에 머물면서 무작정 전화번호부에 있는 모든 영화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그는 ‘세서미 스트리트’ 애니메이터로 영화 산업에 발을 들였다. 이후 루카스 필름에 입사하여 1999년 이후의 모든 스타워즈 시리즈에 참여했다. 이안 매케이그, 그의 명함은 하나가 아니다. 그는 스토리작가, 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터, 콘셉트 아티스트, 비주얼 디벨롭먼트 아티스트, 아트디렉터 등 다양한 타이틀로 소개된다. 어째서 이토록 다양한 직업이 가능할까 싶을 텐데, 응용미술 분야의 직업은 산업 및 기술 변화와 함께 달라지기 때문에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다.

콘셉트 아티스트라는 용어는 1970년대 스타워즈 시리즈를 그린 랄프 매쿼리 때부터 사용되었고, 최근에는 비주얼 디벨롭먼트 아티스트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인다. 이제는 패션, 조명, 제품, 무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의 직업이다. 상업적 목적의 어떤 시각적 창작물 개발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미술’하면 흔히 미술관의 작품 전시 풍경을 떠올리겠지만, 실제로 미술은 365일 바쁘게 돌아가는 모든 실생활과 관련되어 있다. 미술대학을 화가나 조각가 같은 예술가를 위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미술대학 전체에서 순수예술이 차지하는 비율은 30% 수준이며, 실제 순수예술 작가의 수는 매우 적다. 순수미술 학과들이 여전히 상위권 대학을 중심으로 포진해 있지만, 전국적으로는 디자인, 애니메이션, 웹툰, 미디어 등 응용미술 전공을 통해 관련 기술을 습득하여 취업을 하려는 움직임이 압도적이다. 미술대학이라는 말은 곧 “응용미술의 기초를 배우는 곳”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응용미술 관련 교육기관의 양적, 질적 부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많다. 업계의 수요는 많은데 퀄리티 있는 공급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게임디자이너, 웹툰작가, 미술감독…할 일은 많다

‘2022 대한민국 게임백서’(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21년 국내 게임산업 매출액은 전년 대비 11.2% 증가한 20조9,913억 원이었다. 세계 게임시장 규모는 2,197억5,800만 달러로, 한국의 점유율은 7.6%로, 미국(22.0%), 중국(20.4%), 일본(10.3%)에 이어 4위다. 국내 게임사 넥슨의 매출규모가 방탄소년단(BTS)의 소속사 하이브의 3배라고 하면 게임 산업의 크기가 좀 더 와닿을 것이다. 게임 산업은 PC방 게임 수준을 넘어서 영화, 드라마, 소설, 제품, 체험 등의 다양한 장르와 함께 움직이는 IP 개념이기에 그 규모는 거대하다. 2021년 국내 게임 산업 종사자 수는 총 8만1,856명으로 그중에서 ‘개발’ 직종 종사자가 60%, ‘디자인’ 직종 종사자가 약 15%로 조사되었다. 개발자들은 여전히 부족하고, 디자이너의 경우, 수요의 부족보다는 수준의 부족이 지적되었다. 특히 ‘실무경험 있는 교수 인력 부족’에 대한 응답이 가장 많았는데 실무경험이 충분하면서 학위까지 소지한 교육자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최근 ‘그림 그리는 직업’으로서 수입이 상당한 직종이 등장했다. 웹툰 작가들이다. ‘2022년 웹툰 작가 실태조사’(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21년 웹툰 산업 매출액은 약 1조5,660억 원으로, 전년도 대비 48.6% 증가했고, 2017년에 비하면 4배로 성장했다. 1년 내내 연재한 웹툰 작가 평균 연 수입은 1억1,870만 원으로 파악되었다. 2019년의 조사에 따르면, 웹툰 작가들 중에서 미술·디자인 관련 대학 졸업자들이 약 60%였고 미술과 관련한 교육을 전혀 받지 않는 작가들도 약 30%였다. 그러면 미대를 나오지 않아도 되는가 물을 수 있다. 물론 상관없다. 다만, 해당 업계에서 리더급으로 최상위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따져본다면 여전히 고등교육기관에서 유관 전공자에게 더 많은 기회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웹툰 작가뿐만 아니라 응용미술과 관련한 모든 직종에서 동일하다.

영화나 드라마의 엔딩크레디트 명단에 '미술'이 있다. 거기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해당 작품의 ‘아트디렉터’ 즉 미술감독이다. 국내에 이름난 미술감독들 중에서 박찬욱, 봉준호의 여러 수상 작품에서 탁월한 안목을 보여준 류성희, 조화성, 이하준 등이 있는데, 이들 모두 미술대학 졸업자들이다. 영화 분야 외에도, K팝 산업을 주도하는 뮤직비디오 감독이나 아이돌 그룹의 모든 것을 정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자리에도 미술을 전공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순수미술을 전공하든, 응용미술학과로 진학하든, 미술 관련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 많다. 국가공인자격증이 주어지는 의사나 변호사, 회계사처럼 높은 수준의 임금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는 단점은 있지만 그 어떤 전공보다도 강력한 장점도 있다. 바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세부 전공의 구속력이 상대적으로 적은 계열도 미술이다. 미술대학을 졸업한다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그 과정에서 만나는 관련 업계 사람들과 형성되는 인적 네트워크, 그리고 정보력이다. 이 두 가지는 꽤 큰 이득이다. 의대를 졸업한 사람이 게임 디자이너가 된다면 시간과 비용에 낭비가 있지만, 서양화나 조소 전공자가 게임회사에서 근무한다면 시간, 비용, 경험의 낭비는 없다. 반드시 미술대학을 졸업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에 상응하는 노력과 투자는 필수적일 것이다.


인공지능 이미지가 두렵지 않은 이안 매케이그의 자세

미술관련 직업이 많은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럼에도 다가오는 인공지능 시대에서 도태되지 않겠냐고 물을 수 있다. 지난 5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컬럼비아대의 랜스 웨일러 교수는 미드저니, 달리와 같은 인공지능 프로그램들이 그림을 그리는 직업군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의 제인 사우스 교수는 “과거에도 사진기, 복사기 등이 예술가 직업을 죽일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오히려 더 강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반론과 우려도 있다. 자신의 그림이 투입된 인공지능 이미지가 상업적으로 거래되고 있음을 알게 된 몇몇의 아티스트들이 여러 인공지능 회사를 상대로 집단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창작자의 동의나 어떤 보상 없이 데이터가 수집되고 있는 점과 이와 관련한 저작권 문제는 분명 앞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임에는 분명하다.

이안 매케이그는 7년 전, 한 유튜브 영상을 통해 자신의 예술철학, 작업과정, 현업 아티스트들을 위한 조언을 공개했다. 그의 창작적 원천은 다른 예술가들의 그림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가들의 문장이었다는 것, 그림에 대해 본인이 떠들지 말고 대중이 선택하도록 열어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창작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할 줄 아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의 이야기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연상시킨다. 인공지능 이미지 생성의 시작은 문장 입력(프롬프트)이다. 충분한 문장적 지시가 있어야 좋은 이미지를 추출할 수 있다. 생성되는 여러 이미지들 중에서 선별하고 선택하는 것은 인간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과정이 인격적이고 윤리적일 때, 활용 가능한 좋은 이미지를 만날 수 있다. 이안 매케이그는 과거 아날로그 시대를 살면서 이러한 과정과 단계를 몸소 터득했다. 인공지능은 그 과정을 단 몇 초에 해결할 뿐이지만, 기기의 전원을 켜고 프롬프트 메시지를 입력하고 선택하는 모든 일은 결국 우리 인간, 사람의 몫이다. 이런 상상을 해보자. 애플의 ‘비전 프로’와 같은 공간형 컴퓨터로 ‘눈물을 마시는 새’ 게임을 열고, 여러 나라 사람들과 자동번역기로 대화를 나누면서 도깨비들과 싸우는 퀘스트를 하는 아이의 모습은 어떨까? 그 아이의 얼굴에는 여전히 귀여운 미소가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미술교육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