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세대가 연애하지 않는 이유를 다룬 기사 '돈, 젠더, SNS 등 눈치볼 게 천지... 그래서 연애는, 미친 짓이다'에서 이어집니다. 제목이 클릭되지 않을 경우 아래 주소를 입력하시면 기사로 연결됩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60619580002972
일찌감치 공공기관에 취업해 또래보다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김승후(가명·22)씨. 그에겐 중학교 때부터 7년을 만난 여자친구가 있다. 원래는 취업 문턱만 넘으면 여자친구와 결혼하기로 했었지만, 인생 첫 월급(240만원) 명세서를 받아들자마자 갑자기 생각할 것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사실 승후씨는 큰 걸 바라는 것도 아니다. "보라빛 조명이 내리 쬐는 성대한 호텔 결혼식"을 하겠다거나, "자기 명의의 아파트는 필수"(절반세대들이 전한 '요즘 결혼'의 조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냥 평범한 예식장에 스드메(스튜디오·드레스·메이크업)를 합치면 비용만 수천만원. 서울 부모님 집 근처 10평 대 빌라 전세를 얻으려 해도 '억'소리가 난다. 3,000만 원도 안되는 연봉을 앞으로 10년 간 한푼도 안 쓰며 모아도, 대출 신세를 져야 한다.
"결혼은 중산층 이상의 문화"가 됐다는 한 소설가(김영하)의 평처럼 대한민국에서 결혼·출산은 일종의 '특권'이 됐다. 부모가 집을 물려주거나 결혼자금을 지원해줄 수 있느냐에 따라 '수저론'이 시작되고, 본인이 전문직으로 고소득이 가능하냐에 따라 '라이센스 만능론'이 위력을 발휘한다. 비슷한 수준의 사람끼리 만나 가정을 꾸리는 '그들만의 리그'가 된 결혼은 한국 사회에서 대물림 되는 계급을 드러내는 인증마크다.
대학생 성도율(가명·22)씨는 연애는 '단타'로 편하게 즐기지만, 결혼할 배우자만큼은 결혼정보업체(결정사)를 거치겠다고 말했다. 그는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인데, 수준이 맞는 사람끼리 만나야 행복하지 않겠느냐"며 "연애에선 경제력 차이가 용납되지만, 결혼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되던 시절은 끝났다"고 단언했다.
부모세대에 가능했던 '단칸방 신혼집'에서의 시작은 절반세대에겐 정녕 불가능한 일일까. 알뜰살뜰 아끼며, 차곡차곡 모으며, 살림을 불리는 재미도 있지 않을까. 절반세대는 코웃음을 쳤다.
더 나은 '결혼의 자격'을 스스로 갖추기 위해 연애를 일부러 미루고 자기계발에 매진하고 있는 직장인 최연수(가명·22)씨는 매우 현실적인 얘기로 '단칸방 이론'을 반박했다. 연수씨는 "불완전한 사람들끼리 만나서 완전해지길 기다리기보다 처음부터 완전한 사람들끼리 만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김나현(가명·23)씨는 단칸방 로맨스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고 했다. "열심히 일하면 집 한채 마련하고 아이 둘,셋을 키울 수 있었던 부모님 세대의 고도성장기 경제시절과 지금이 같나요? 그땐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안 되죠."
여자친구에게 아직 '결혼 포기' 마음을 말하지 못했다는 김승후씨는 매달 넣던 적금(100만원) 중 80만원을 주식으로 돌리며 재테크 공부에 나섰다. '부모찬스'를 쓰기도 어렵고, 월급만으로 버텨야 하는 승후씨가 대한민국에서 '결혼 자격증'을 딸 수 있는 유일한 길 같아서다.
지방 출신의 김나현씨는 "엄마처럼 희생하면서 살고 싶지 않고, 살 수도 없다"며 결혼을 거부하는 중이다. 승무원을 꿈꾸던 어머니(70년대생)는 스물 다섯에 결혼해 사무직과 부동산 중개업 등을 하며 삼남매를 키우고, 집안 살림까지 전부 챙기는 슈퍼우먼이었다. 아버지도 도와주시려 애썼지만, '투잡'을 뛰느라 집까지 챙기기엔 한계가 있었다.
서울에서 자취를 한 뒤 집안일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동력이 투입되는지 체감하고서야, 나현씨는 '워킹맘'이라는 단어에 새겨진 '강요된 고단함'을 돌아보게 됐다고 한다. "가족들 밥을 다 먹이고 설거지를 할 때마다 엄마가 혼잣말로 그러셨거든요. '만드는 건 한 시간인데, 먹는 건 금방이네.' 야근 끝내고 와서 빨래를 돌리며 한숨 쉬시던 모습이 계속 떠올라요."
사회는 결혼 출산을 장려하겠다며, '일과 가정 병행'을 이야기하지만, 나현씨는 너무 잘 안다. 가사노동과 양육 책임을 여성의 몫으로만 여기는 고정관념을 타파하지 않는 한, 이 세상 대부분 가정은 워킹맘의 한숨과 노고를 동력 삼아 번듯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걸. "(그렇게 살았던) 엄마도 요새는 '결혼 그거 꼭 안해도 된다'는 말씀을 자주 하세요." 나현씨는 씁쓸하게 웃었다.
자, 이제부터 출산 얘기다.
연애와 결혼의 장벽도 높았지만, 그 어려운 장벽을 넘어 '결혼할 수 있다'고 말한 절반세대들도 출산에 대한 거부감은 꽤나 강했다. 왜냐고 물었더니 "아이를 낳는다면 남부럽지 않게 제대로 키워야 하는데 그럴 자신은 없다"거나 "결국 나도, 아이도 불행할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출산=불행'이라는 등치관계가 형성된 이유는 여럿이었다. 먼저 커리어 단절에 대한 우려가 가장 컸다. 특성화고(조리학과) 전공을 살려 쭉 요리 컨설팅 분야에서 경력을 쌓고 있는 조혜주(가명·23)씨는 아이를 낳고 직장을 그만 둔 '선배 언니'들을 여럿 보면서 출산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고 했다. "주변에서 아이 낳고서 일하는 언니들을 보면 정말 많이 지쳐하더라고요. 아이를 제대로 케어하지 못하는 데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다 결국 그만두고, 짧게는 2,3년, 길게는 10년 이상 일을 쉴 수 밖에 없다고도 하는데 그 정도면 경력의 단절이 아니라 그냥 종말 아닌가요?"
눈 앞에 뻔히 보이는 경력 단절을 우려해 일찌감치 진로를 바꾸는 경우도 있다.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인생의 필수"라 여기는 2002년생 대학생 송혜인(가명·21)씨는 언론사 입사를 희망했지만, "아이 낳고 키우면서 일하면 아이도 나도 각자의 경쟁에서 밀려날 것 같아" 출산 이후에도 직업을 유지할 수 있는 세무사 등으로 진로를 틀었다고 한다.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던 '나의 불행'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는 답도 있었다. 절반세대들이 출산을 꺼리는 이유 중 하나다.
대학생 이민준(가명·25)씨는 학창시절을 떠올리면 '학원 뺑뺑이' 기억 밖에 없다. 맞벌이하는 부모님은 사교육을 많이 시키는 게 '자식 사랑'이라 여겼겠지만, 정작 민준씨는 불행했단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게 부족했고, 지금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으로 남아 있어요. 제가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열심히 돈 벌어 학원에 바치느라 힘들고, 아이는 아이대로 사교육에 치여 힘든 상황을 또 다시 겪을 수 밖에 없을텐데. 그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요?"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조건에서 살게 해줄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함도 출산을 포기하게 만든다. "부모님이 저한테 평생 누리게 해주셨던 모든 것들 저는 과연 제 아이에게 해줄 수 있을까요?" 김승후씨는 부모님보다 한참 모자란 자신의 월급이 너무 원망스럽다. 내 아이도 이럴 수 있다고 생각하니 답이 안 나온다.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싫다. 부모들과는 180도 달라진 절반세대를 보며, 일부 어른들은 이기적이라고 몰아붙인다. 아이 낳기 거부하는 청춘 탓에 나라가 곧 망할 거라고 호들갑을 떨며, 제발 아이를 낳으라고 윽박지르기 바쁘다.
절반세대는 되묻는다. "그 책임, 왜 우리가 져야 하죠? 왜 우리에게 희생을 강요하나요?"
대학생 이민준씨는 "인구의 위기를 청춘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보는 시각 자체가 잘못됐다"며 "연애도,결혼도, 출산도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사회를 만든 기성세대가 책임져야 할일 아니냐"고 따졌다. 최연수씨 생각도 마찬가지. "일단 내가 속한 세상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면 누가 아이를 낳으려 하겠어요. 그 아이도 뻔히 불행할 걸 아는데. 그러니까 저희에게 아이 낳아라 협박만 할 게 아니라, 결혼 출산을 하더라도, 나도 아이도 포기하지 않게끔, 불행한 한국사회를 행복하게 만들어가는데 돈을 썼으면 합니다."
인구가 소멸해 대한민국이 사라질 수도 있는 중차대한 문제에 맞서, 절반세대들도 나서야 하는 것 아닌지를 물었다. 송혜인(가명·21)씨는 해맑은 말투에 체념을 담아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