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불화에 상처받은 어린 시절, 똑같은 부모가 될까 봐 겁나요

입력
2023.06.19 04:30
24면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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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얼마 전 결혼해 가정을 꾸린 새댁입니다.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집에서 자라 화목함을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인지 내 가정을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너무나 막막합니다. 남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앞으로 아이를 낳아서 잘 키울 수 있을지 덜컥 겁부터 납니다. 부모님을 닮은 배우자가 될까 봐, 자식에게 상처를 주는 엄마가 될까 봐 벌써부터 우울하고 두렵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싸움이 일상이었어요. 1주일에 두세 번꼴로요. 심할 때는 창문이나 물건이 부서진 적도 있고, 부모님이 서로 할퀴어서 피가 난 적도 부지기수였죠. 성격 문제, 정리 정돈, 원가족 등 싸움의 원인은 늘 달랐지만 패턴은 비슷했어요. 두 분은 한 번 싸우면 짧게는 2주, 길게는 1년 반이 넘도록 말 한마디 안 하고 지냈어요. 아버지는 방에 틀어박혔고, 어머니는 저를 붙잡고 하소연을 시작했죠. 그 모습을 보면서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어요.

남들 보기엔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화목한 집이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어요. 부모님은 성격이 정반대예요. 아버지는 30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시다 퇴직을 하셨어요. 가족들에게 큰 관심이 없고 교류하는 사람도 많지 않아요. 감정 기복이 없고 조용한 성격인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예민하고 매사에 적극적이에요. 물건뿐 아니라 사람도 본인의 마음에 따라 고쳐야 성에 차는 사람이에요. 제 신혼집 가구나 물건도 어머니 마음에 드는 방향과 장소에 놓도록 강요하세요.

최근 어머니의 자살 소동을 기점으로 저와 어머니 관계까지 악화됐어요. 발단은 어머니의 화를 돋우는 아버지와 고시 장수생인 오빠의 낙방 소식이었죠. 전 명문대생인 오빠에게 학업으로는 못 미쳤고 부모님의 기대도 덜한 자식이었어요. 하지만 치열하게 노력해 좋은 직장에 들어갔죠. 어머니는 취업에 성공한 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는커녕, 아픈 손가락인 오빠와 마음에 들지 않는 아버지를 비난하며 하소연만 했어요. 더 이상 참기가 힘들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저에게 어머니는 "딸이 그런 것도 못 들어주냐"며 화장실로 뛰쳐 들어가 샤워기 줄로 목을 감았어요. 실랑이 끝에 상황은 정리가 됐지만 저는 아직도 그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나고 소름이 끼칩니다. 저를 감정 쓰레기통쯤으로 치부하는 어머니와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다고 생각했을 무렵 가정적이고 다정한 남자를 만났고 도망치듯 결혼했습니다.

독립한 지금도 5분 거리에 있는 친정집에 거의 매일 가고, 자주 통화를 합니다. 어머니의 한숨과 하소연은 여전하고, 그때마다 어린 시절 상처가 떠올라 너무 괴롭습니다. 소중한 배우자를 만났고, 조만간 아이를 낳고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데, 과거를 떨쳐버릴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그토록 증오했던 부모님처럼 남편에게 너무나 쉽게 짜증을 내고, 날 선 말로 비수를 꽂는 제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요. 배우자에게 나의 폭력적인 모습을 보여줄까 봐, 자식을 낳아서 고통만 물려주게 될까 봐 두렵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소영(가명·32·직장인)

소영씨, 사연을 읽으면서 어린 당신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습니다. 반복적인 부부의 다툼은 자녀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줍니다. 다툼 자체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부모님 중 한 사람이라도 소영씨의 마음을 헤아려줬다면 상처를 덜 받았겠지요. 그런데 소영씨의 아버지는 존재감이 없었고, 어머니는 자녀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기는커녕 '너라도 나를 이해해달라'고 요구만 했지요. 아버지는 무력했고 회피적이었으며, 어머니의 양육 태도는 감정적이고 강요적이었습니다. 온전히 의지할 사람이라곤 없는 집에서 자라면서 심적으로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을까요. 매일같이 싸우는 부모님을 보면서, 공부 잘하는 오빠만 싸고도는 어머니를 대하며 외로움, 무력감, 때로는 분노를 느꼈을 겁니다.

부모가 아이를 키우는 것은 안전하고 건강하게 자라도록 돌본다는 의미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성인이 됐을 때 독립적인 존재로 설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독립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죠. 어린 시절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부모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으면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이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소영씨는 부모님에게 자신이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성장했어요. 부모에게 온전히 의지하고 인정받는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몸은 성인이 됐지만 나이에 맞게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기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어머니의 통제적인 행동이 싫고, 그 관계에서 오는 불편한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머니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남아있는 것이죠. 소영씨도 어머니로부터의 분리를 생각하고, 시도도 했을 겁니다. 다만 그걸 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아직 부족했겠지요. 어머니에 대한 연민, 가족을 향한 애틋한 마음, 무엇보다도 인정과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발목을 잡았을 거예요.

문제는 그런 경험이 지금도 당신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거예요. 좋은 배우자를 만나 새로운 가족을 꾸린, 흔히들 말하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을 지나고 있지만 마음속은 두려움으로 가득하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생각하면서 좋은 부모가 되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에 사로잡혀 괴롭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어렸을 적 경험했던 부모님의 모습이 순간순간 떠오르기 때문일 거예요. 그 시절의 감정에 지금도 압도되는 것이죠. 남편과의 작은 다툼에도 치열하게 싸웠던 부모님이 떠오르고, 순간 화가 나서 남편에게 감정을 표출할 때도 어머니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있는 거죠. 태어나지 않은 아이와의 관계를 미리 걱정하는 것도 부모의 사랑을 갈구했던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미래의 내 아이에게 과도하게 이입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소영씨는 어머니와 다른 사람이고, 남편 역시 아버지와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사연에서 남편이 가정적이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아마 남편은 당신과 대화도 많이 하고,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일거예요. 그것은 소영씨에게 가장 중요한 심리적 자원입니다. 당신에게 아직도 부모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을 뿐 그렇다고 부모님과 똑같은 사람이란 건 아니에요. 좋은 부모가 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는 마음도 이해합니다. 어린 시절 소영씨는 부모의 충분한 감정적 보살핌을 받고 자라지 못했죠. 일촉즉발 분위기 속에서 늘 부모님의 반응을 먼저 살피면서 자랐어요. 그 와중에 어머니의 영향이 특히 컸기 때문에 소영씨에게 과도하게 영향을 주게 된거죠.

감정이 복잡하고 조절되지 않는 것은 어머니와 심리적으로 분리할 때가 왔다고 내 마음이 주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수면 아래 있는 어머니에 대한 혼란스러운 양가감정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통합할 시점입니다. 자율성을 획득하기 위해 독립하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인정받고 의존하고 싶은 상반된 마음이죠.

어머니를 만날 때는 경계를 설정해놓고 만나는 게 좋습니다. 어머니에게 직접 얘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머니가 선을 넘는 상황이 생기면 핑계를 대서라도 슬쩍 피해보세요. 오랫동안 해오던 대로 거절하지 못한 채 끌려가지 말고 조금씩 내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연습을 해보세요. 어머니도 그것을 느끼고 더 다가오려 할 것이기에 결코 쉽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조금씩 노력이 쌓이다 보면 천천히 어머니의 그림자를 걷어낼 수 있을 겁니다.

소영씨, 부모 역할이 결코 쉽지 않고 부담이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마음을 꾸준히 이해하고 인식하려는 태도입니다. 그래야 아이와 자연스럽게 정서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거든요. 소영씨가 꾸린 지금 가정만 보면 행복하지만, 과거가 연상되며 두려움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해결되지 않은 양가감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양쪽의 복잡한 감정들을 외면하거나 억압하기보다는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세요. 지금 현재의 감정에도 집중하려고 노력해보세요. 소영씨에게는 마음을 나누면서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가족이 곁에 있습니다. 소영씨는 아이에게도 충분히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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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손효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