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 림짜른랏(42) 태국 전진당(MFP) 대표는 아시아 최고의 이슈 메이커다. '젊은 개혁 정당'을 표방한 전진당은 지난달 14일 실시된 태국 총선에서 거대 양당을 제치고 하원 제1당이 됐다. 이변이었다. ‘쿠데타 군부의 정당' 대 '부패한 탁신 가문의 정당'이라는 양강 구도가 20여 년 만에 깨졌다.
피타 대표는 △군주제 개혁 △징병제 폐지 △동성 결혼 합법화 등의 공약으로 여전히 왕가가 사회를 호령하는 보수적인 태국 사회를 흔들었다.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출신이라는 스펙에 뛰어난 대중 연설 능력 등의 자질을 갖춘 그는 태국에서 아이돌급 인기를 몰고 다닌다. 그가 주도하는 야당들과의 연립정부 구성 협상이 순탄하게 마무리되면, 이르면 오는 8월 총리에 취임한다. 그가 집권한다면 동남아시아 역내에도 변화의 바람을 일으킬 전망이다.
피타 대표는 4일 태국 방콕에서 한국일보와 만나 "태국 유권자들은 급진적 변화를 원한다"며 "태국은 21세기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세계 질서에 참여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그가 한국 언론과 인터뷰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 시간 넘게 이어진 인터뷰에서 피타 대표는 ‘변화’를 여덟 차례 언급했다. 그는 “전진당의 총선 승리가 태국 정치와 사회 변화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 실제 태국에서 진보·개혁 이슈를 내건 정당이 선거에서 유권자 다수의 선택을 받은 것도, 40대가 정치권에서 주류로 부상한 것도 처음이다.
태국 군부는 1932년 이후 19차례나 쿠데타를 일으켰다. “패배한 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선거 결과를 뒤집고 피타 대표를 탄압할 수 있다”는 전망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피타 대표는 “바로 지금이 태국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결정적 순간이며,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고 말했다. 태국의 미래를 위해 군부가 권력욕을 버리고 민심을 따라야 한다고 우회적으로 요구한 것이다.
난제인 연정 구성을 두고도 자신감을 내보였다. 의원내각제를 도입한 태국에선 총리를 상·하원의 표결로 뽑는다. 상원을 군부가 장악한 만큼, 하원에서 야당들을 대거 규합해야 피타 대표가 총리직에 오를 수 있다. 전진당의 핵심 공약인 '왕실모독죄 폐지'에 반대하는 야당들이 주저하는 것이 변수다. 왕가를 비판하는 국민을 엄벌에 처하는 왕실모독죄는 입헌군주제를 철통 보호하는 장치다.
왕실모독죄 폐지 공약 자체가 태국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왕실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진다. 피타 대표는 그러나 “왕실모독죄 폐지 공약의 후퇴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군주제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군주제 유지'와 '시민들이 발언할 자유 보호'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총리 취임을 위해 군주제 개혁 약속을 포기할 수 없다는 승부수를 띄운 셈이다.
피타 대표의 이 같은 자신감은 청년층의 확고한 지지에서 나온다. 4일 현지에서 확인한 ‘피타 열기’는 뜨거웠다. 방콕 외곽 전진당 당사에 있는 카페는 청년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청년 40여 명은 삼삼오오 모여 정치 관련 대화를 나누거나 피타 대표의 동정이 실린 신문과 잡지를 읽었다. 카페 관계자는 “몇 달 전만 해도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장소가 아니었지만, 총선을 기점으로 핫스팟이 됐다”고 말했다.
전진당 당사로 가는 길에 이용한 차량공유서비스 '그랩'의 운전기사에게 "피타 대표를 인터뷰하러 간다"고 하자 "나도 피타의 팬이다. 외국인이 태국 정치에 관심을 가져줘 고맙다”면서 택시비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피타 대표는 4일 방콕에서 열린 성소수자 퍼레이드에 참석해 개혁 선명성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를 보기 위해 방콕을 찾았다는 대학생 니라는 “기득권 정치인들이 연정 구성을 막고 피타 대표의 발목을 잡으면 청년들의 거센 반란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