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작구 남성사계시장에서 33년째 속옷 가게를 운영 중인 이모(75)씨는 요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지난해 집중호우로 물에 젖은 상품을 죄다 내다 버린 아픈 기억이 있는데, 올여름도 만만치 않은 비가 예보된 탓이다. 시장 주변의 침수 방지 시설도 1년 동안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이씨는 5일 “비닐봉지에 닥치는 대로 물건을 담아 넣는 연습 정도가 유일한 대비책인 것 같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지난해 여름 수도권 일대에 쏟아진 기록적 폭우로 주민뿐 아니라 상인들도 막대한 피해를 봤다. 그러자 지방자치단체도 지원 대책을 내놨다. ‘풍수해보험 가입’과 ‘물막이판(차수판) 설치 지원’ 등 크게 두 가지다.
하지만 상인들은 당국 대책이 영 못 미더운 눈치다. 중소벤처기업부 자료를 보면, 지난해 폭우로 수도권 70개 전통시장의 약 1,500개 점포가 ‘물폭탄’을 맞았다. 특히 피해가 컸던 남성사계시장과 관악구 관악신사시장을 취재진이 둘러보니 상인들은 복구도 아직 덜 됐는데, 또다시 장마와 집중호우에 대비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먼저 풍수해보험은 불의의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를 국가가 보상하는 제도다. 행정안전부가 민간보험사와 약정을 맺어 보험료의 70~92%를 지원한다. 소상공인 상가는 최대 1억 원을 보상받을 수 있다. 두 시장 상인회에 따르면 본인 부담률이 낮은 덕에 대부분 상인이 보험에 가입했다. 단, 보험은 ‘사후 대책’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어 예방 효과는 없다고 봐야 한다.
사실상 유일한 예방책이 차수판 설치인데 적잖은 상인들이 효과에 반신반의하고 있다. 차수판은 보통 지상에서 40㎝ 높이로 설계된다. 이보다 높아지면 무게가 많이 나가 빠른 대응이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인들은 기준 높이를 넘어서는 폭우엔 차수판이 무용지물이란 사실을 작년에 뼈저리게 경험했다.
설치 시점도 늦었다. 관악구청은 올 초 상인들 신청을 받아 지난달 말부터 차수판을 설치하기 시작했다는 입장이다. 반면 시장 상인회는 지난달 말에야 구청 연락이 왔다고 반박했다. 구청 주장이 맞다 해도 본격 장마 전까지 차수판 설치 완료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관악구청 관계자는 “다른 자치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해 빨리 차수판 설치를 시작한 편”이라면서도 “지난해 침수된 건물의 70%가 올해 목표”라고 말했다. 모든 침수 예상 지역에 차수판 설치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차수판도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다. 이미 한반도에서도 잦은 기상 이변의 피해가 속출하는 만큼, 결국 ‘배수시설 정비’ 같은 근본적 해결책이 필요해 보인다. 관악신사시장에서 과일 상점을 운영하는 권모(55)씨는 “지난해 차수판이 있었는데도 물이 넘쳐 들어와 물건을 다 버려야 했다”며 “빗물을 개천으로 뽑아 올리는 펌프를 늘리고 주변 배수시설 공사를 다시 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배수 정비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들어 정부의 장기적 안목과 결단 역시 중요하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배수처리 시설이나 (저류시설) 용량 확보는 지자체와 정부가 책임질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시장 상인들은 가게 앞에 모래주머니를 쌓거나 배수구에 담배꽁초 등 쓰레기가 들어차 역류 현상이 생기지 않도록 물 빠짐이 가능한 덮개를 씌워놓는 등 갖가지 고육책을 동원하고 있다. 남성사계시장의 식당 사장 서모(60)씨는 “비가 조금이라도 덜 내리기를 바랄 뿐 특별히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답답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