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현시점에선 금 보유량을 확대하는 것보다는 미국 달러화 유동성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내놨다. 신흥국 중앙은행들의 금 매입이 지난해부터 이어지고 있으나, 한은은 당분간 현재 보유량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6일 한은 외자운용원은 '보유 금 관리현황 및 향후 금 운용 방향'에 관한 자료를 내고 "일각의 주장처럼 외환보유액 중 금 보유 확대가 긴요한지에 대해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지난해 세계 중앙은행들의 금 매입량은 1950년 이후 최대였고 올해도 추세가 이어지면서 "한은도 금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선을 그은 것이다.
한은에 따르면 튀르키예, 중국, 이집트, 카타르 등 신흥국들은 지난해 다량의 금을 매입했다. 그중 중국 런민(人民)은행은 3월까지 5개월 연속 금을 매입해 1978년 관련 통계를 발표한 후 45년 만에 가장 많은 금 보유량을 기록했다. 지난해 말 기준 세계 6위 수준이다.
중국 등이 금 보유량을 늘리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추정된다. 첫 번째는 ①달러 가치 하락이다. 지난달 주요 6개국 대비 달러지수가 104로 반짝 튀어 오르긴 했으나, 114를 찍었던 지난해 하반기에 비하면 하락 추세다. 달러 가치를 올리는 미국의 금리 인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금값을 표시하는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 헤지(위험 차단)를 위해 금 매입을 늘린다. 더불어 금과 달러는 '양대 안전자산'이기 때문에 달러값이 떨어지면 반대급부로 금값은 강세를 띤다.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 가격 상승을 기대해 금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두 번째는 ②미 달러화 의존도를 낮추려는 것이다. 투자 다변화 목적도 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달러 패권의 균열이 감지되고 있어서다. 서방 제재로 달러 거래가 불가능해진 러시아는 대체재로 중국 위안화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 사우디아라비아, 브라질 등도 동참하면서 탈(脫)달러는 힘을 받는 모양새다. 물론 3월 기준 국제은행간통신협회(스위프트) 결제망에서 사용된 위안화는 2%(달러는 40%대)에 불과해 아직까진 미약한 반란이긴 하다. 지난해 미국 등 주요국의 긴축 급발진 이후 글로벌 경기침체 전조가 은행 위기 등으로 나타나면서 ③안전자산을 확보하려는 것도 금 매입이 느는 이유다.
반면 한은은 2013년 2월부터 10년째 금 보유량이 104.44톤으로 동일하다. 지난해 말 기준 금 보유량은 세계 36위다. 당장은 금을 추가 매입할 계획도 없다. 이날 한은이 밝힌 이유는 크게 네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①외환보유액이 지난해 400억 달러 감소한 상황에서 유동성이 낮은 금을 굳이 매입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지난해 킹달러에 눌려 원홧값이 1,440원대까지 하락하자 외환당국은 시중에 달러를 풀어 달러값을 일시 잠재우는 시장안정화 조치를 취했다. 이 때문에 외환보유액이 감소했고 "당분간 이전 수준을 회복할 기대가 크지 않다"는 진단이다.
또 ②경기침체 가능성, 지정학적 리스크 등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선 오히려 달러 유동성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 리스크에 대비하는 더 나은 방법이란 판단이다. 우리나라가 보유한 달러는 대부분 미국 국채로 갖고 있는데 ③2018년 이후 금 가격과 미 국채 투자 성과는 상당 수준 동조화(커플링)해 굳이 미 국채를 매도할 유인도 없다는 설명이다.
게다가 금 가격이 전고점(2020년 온스당 2,069.4달러)에 근접한 상황이라 ④향후 상승 여력이 불확실하다는 점도 주저하게 만든다. 한은은 금을 마지막으로 매입했던 2011~2013년 "상투 잡혔다(고점에 매수해 손실을 보다)"는 비판에 시달린 바 있다.
하지만 "미국 달러 움직임을 봤을 때 금 보유를 점진적으로 늘려야 한다"며 반론을 펴는 전문가도 있다. 김영익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는 미국의 재정·무역수지 적자 등 대내외 불균형을 감안하면 "2~3년 후 달러 가치는 20% 이상 떨어질 것"이라고 본다. 그는 "달러 가치가 1% 떨어지면 금 가격은 1% 이상 오른다"며 "지금부터 금 보유량을 늘려야 한다. 한은 판단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