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전·현직 고위 간부들의 자녀 특혜 채용 의혹과 관련해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한때 '선관위원 전원 사퇴' 방안까지 논의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내년 총선을 앞두고 선관위가 와해되면 선거 관리에 공백이 생길 수 있어 실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국민의힘은 5일 선관위원 전원 사퇴를 촉구하며 압박 수위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한 선관위원은 이날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번 채용 특혜 의혹과 관련해 "흠이 있는 박찬진 사무총장, 송봉섭 사무차장을 우리가 임명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며 책임을 인정했다. 그는 특히 '선관위원 전원 사퇴'에 대해 "우리도 생각을 해봤다"며 "'우리가 책임지는 방법이 뭐가 있나' 얘기를 하다가 그런 얘기도 나왔었다"고 말했다. 국민의힘이 이날 선관위원 전원 사퇴를 요구하기 전에 이미 선관위원들 사이에서 전원 사퇴 관련 논의가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선관위원은 "당장 그렇게 되면 선관위가 안 돌아갈 것이고, 내년 총선 관리가 안 된다"며 "조직이 완전히 와해되기 때문에 선택지에서 일단 배제했다"고 말했다. 내년 총선을 1년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 선관위원 9명이 모두 자리를 비우면 선거 관리 측면에서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그는 "전체가 책임지는 것은 정말 무책임하다"면서도 "우리 중에 누군가 책임을 지는 건 모르겠지만"이라고 전제를 달았다. 노태악 선관위원장이 선관위를 대표해서 책임을 지는 것은 가능하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국민의힘은 이날 국회에서 의원총회를 열고 △선관위원 전원 즉각 사퇴 △감사원 감사 즉각 수용 △국민에 대한 석고대죄 및 조직 개혁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국민의힘은 이번 특혜 채용 의혹이 불거진 뒤 줄곧 노 위원장의 사퇴를 주장해 왔는데, 이날은 아예 선관위원 전원 사퇴를 요구했다.
윤재옥 원내대표는 선관위원들이 만장일치로 감사원 감사를 거부한 사실을 들어 "선관위가 현재 문제점을 심각하게 전혀 보지 않고, 반성 여지도 없으며 국민적 공분을 무시하려는 것을 방증한다"며 "어느 한 사람도 자정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한 몸처럼 쇄신을 막는 선관위원들은 전원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철규 사무총장은 "국민을 무시하는 결정을 내린 선관위원장과 선관위원 모두는 더 이상 국민을 대표해 공정한 선거관리를 책임질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선관위원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3인, 국회에서 선출하는 3인,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3인 등 총 9인으로 구성된다. 현 선관위원 가운데 노 위원장을 포함한 3인은 김 대법원장 지명을 받았고, 김필곤 상임위원 등 3인은 문 전 대통령이 임명했다. 국회에서 선출한 3인 중 2인은 국민의힘이, 1인은 더불어민주당이 추천했다. 9명 중 7명이 직·간접적으로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과 관련이 있는 셈이다. 국민의힘은 이번 의혹을 계기로 내년 총선에 앞서 이 같은 선관위원 구성을 뒤엎고 새 판을 짜야 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선관위 압박을 위해 감사원 감사를 지렛대로 삼고 있다. 윤 원내대표는 "선관위는 국가기관으로서의 청렴성, 윤리성은커녕 독립성과 공정성도 사라진 지 오래"라며 "유독 감사원 감사를 거부하며 민주당 출신 전현희 위원장의 국민권익위원회와 국회 국정조사만 고집하는 건 민주당을 방패 삼아 비리를 은폐하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전날 김기현 대표가 민주당과 선관위의 공생 관계를 주장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높아지고 있는 여권의 압박 수위에 선관위는 채용 의혹에 대한 감사원 감사 수용 여부를 고심하고 있다. 선관위 관계자는 이날 "기존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면서도 "선관위원들끼리 (감사원 감사 수용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여지를 남겼다. 이에 따라 선관위원들은 후임 사무차장 후보 검증과 외부인 사무총장 후보 추천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9일 전체회의나 그전에 긴급회의에서 감사원 감사 수용 방안에 대해 의견을 나눌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