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부터 SNS를 통해 간간이 들려오던, 여자 댄스 가수들의 순회공연을 소재로 한 새 예능 프로그램 소식이 지난 5월 25일 '댄스가수 유랑단'이라는 제목으로 뚜껑을 열었다. 웬 유랑단? BTS가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톱 소셜 아티스트' 상을 수상한 지 5년이 지났다. 올해 칸 영화제 레드 카펫은 블랙핑크 멤버들의 출현으로 북새통을 이뤘다고 한다. 이처럼 기획사의 인하우스 시스템(아이돌 그룹의 멤버 선발, 훈련, 데뷔, 활동을 한 기획사 내에서 모두 소화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을 통해 길러진 한국의 아이돌 그룹들이 글로벌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지금, 전근대적인 떠돌이 놀이패의 추억을 소환하는 '유랑단'이라는 명칭은 낯설다. 이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이들이 케이팝 진화 과정의 변곡점들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떠들썩한 웃음 속에서도 툭툭 끼어드는 그 시절의 애환과 고충, 무대와 대중을 갈망하며 즐기는 댄스 가수들의 모습을 시청한 후에는 이들이 '유랑단'을 자처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사실 가수를 비롯한 연예인이 선망할 만한 직업인이요, 한국문화산업의 주요 행위자로 여겨지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연예인은 비하적인 명칭인 광대, 사당패, 기생이라 불렸다.
광대패나 사당패는 조선시대부터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음악과 춤, 전통 유희를 보여주고 그 대가로 받은 돈과 음식으로 생활한 유랑예인(流浪藝人) 무리였다. 특히 사당패는 절을 버리고 떠난 승려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며 불교음악에서 파생된 선소리 산타령을 주로 부른 데서 연원한다. 숭유억불 시대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식민지화를 통한 초기 자본주의 시기, 노래와 춤, 기예를 팔기 시작한 이들로는 기생을 빼놓을 수 없다. 조선 시대 궁중이나 관아에 속해 있었던 기생들은 왕조가 무너진 후 생겨난 요릿집에서 재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들 또한 권번이라는 기생 조합에 소속되어 이 요릿집, 저 요릿집을 전전하며 기예를 선보인 유랑예인들이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이후 전개된 영화, 라디오, 가요 등 근대적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성장한 연예산업에서 활약했다. 1920년대 조선 최초의 여배우들과 1930년대 음반사 소속 명창들 대부분이 기생들이었다.
이들은 노래와 춤, 기예뿐 아니라 성도 판다고 간주되었다. 여자 사당패들은 물론이고 당시 일제가 도입한 공창제에서 성을 팔지 않는다고 범주화된 예기(藝妓)도 암묵적으로는 성매매를 한다고 여겨졌다. 첩이 된 사례들이 있기도 하다. 여성 예인들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생존할 수 없었던 시대였음을 보여주는 예이지만 낙인은 그녀들에게로 향했다. 여성 연예인에 대한 비하와 경멸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해방 후 연예인들은 정치 스캔들의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특히 1970년대에는 중앙정보부가 연예인들의 주무대였던 영화계와 방송계를 직접 관리했다. 요정(일제 시기 요릿집의 변형)은 중앙정보부가 직접 관리한 또 하나의 장소였다. 요정에서 이 시기 모든 중요한 정치적 결정이 이뤄졌으니 '국가안보 및 정권안보'라는 중앙정보부의 명분이 아주 허튼 말만은 아니었다. 언론학자 강준만이 쓴 책 '룸살롱 공화국'에는 중앙정보부 내 요정의 정보를 총괄 수집하는 미림(美林) 팀이 "장안의 일류 요정 마담들이, 주인들이, 때로는 일류 탤런트들도 숨을 죽이고 다소곳하게 나오곤 하는 곳으로... 말 잘 안 듣거나 태도가 트릿하면 눈퉁이가 퍼렇게 멍드는 건 아무 것도 아니요, 그 정도로 안 되면 그까짓 요정 하나, TV 출연계약 같은 건 한순간에 물 건너가는 곳"이라는 전 중앙정보부원의 증언이 등장한다. 이런 문화는 실제 요정 출입 여부와 상관없이 으레 여성 연예인을 남성 권력자의 소유물로 간주하는 대중 인식을 낳았다. 참으로 엄혹한 시절이었다.
1980년대 말 민주화와 소비 사회화는 이런 연예인 상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특정 시대의 인기 연예인들은 그 시기 보통 사람들의 욕구와 정서를 대변한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한국 사회에 등장한 청춘스타들은 경제 성장과 민주화로 가능해진 개인성에 대한 존중, 그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사회에 대한 대중 열망의 구체적인 양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댄스가수 유랑단' 멤버 중 김완선과 엄정화는 이 시기 대표적 청춘스타들이다. 김완선의 1986년 데뷔곡 '오늘밤'은 연인과의 이별을 노래한 가사를 경쾌한 리듬과 파격적인 댄스로 선보였다. 이별에 수반되는 울적함이라는 정념을 신나는 댄스 퍼포먼스로 버무린 이 새로운 감수성은 한국 가요계 역사에서 민주화와 자유화가 표현된 최초의 무대로 거론되는 1988년 무한궤도의 '그대에게'나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보다 앞선 것이다. 가수 엄정화는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2년, 유하 감독)에서 혼외 연애를 당연시하는 여주인공 역할로 연기에서도 주가를 올리기 시작했다. 민주화와 소비 사회화는 연애와 결혼, 성에 대한 기대와 실천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엄정화의 연기는 이런 변화를 갈망하는 젊은 여성의 복잡한 내면을 성공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처럼 자기 주장을 드러내며 개성 있는 패션으로 무장한 당시 여성 청춘스타들은 민주화와 자유화의 상징 그 자체였다.
1990년대 초부터 경제적 효과로 환산되기 시작한 대중문화는 IMF 경제 위기 이후 본격적으로 산업화의 길을 걷는다. 이 시기 연예인은 한국 자본주의의 체질을 변화시킬 새로운 노동주체의 대표주자로 등장한다. 김대중 정부에서 신지식인 1호로 선정된 연예인 심형래가 그 상징적인 예다. 이는 연예인이 신자유주의 한국 사회의 바람직한 국민 역할모델로 변모했음을 의미한다. 2000년대 초반부터 10대들의 장래희망으로 연예인이 부상한 것은 이런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요계는 1990년대 후반부터 기획사 인하우스 시스템을 확립하고, 음반 시장의 몰락을 해외 진출을 통해 타개하고자 했다. '댄스가수 유랑단' 멤버 중 1998년 걸그룹 '핑클'로 데뷔한 이효리와 2001년 일본에서 데뷔한 보아는 1세대 아이돌과 최초 해외 진출 성공 사례로 이 시기 가요계 산업화의 산 증인들이다. 또한 멤버 화사가 데뷔한 2014년 걸그룹 '마마무'는 주로 여성 팬들을 소구하는 퍼포먼스로 '걸 크러쉬 그룹'이라 불린다.
화려하게 빛나는 케이팝의 세계에서 여성 연예인 잔혹사는 먼 옛날 일로 여겨지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불과 몇 년 전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밝힌 걸그룹 멤버에게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고(故) 설리는 여성의 몸과 성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힐 때마다 엄청난 악플을 감내해야 했고 고(故) 구하라는 남자친구의 협박과 폭행으로 이미지 손상과 악플을 견뎌야 했다.
더 큰 문제는 이 젊은 여성들의 표현과 좌절이 아무런 반향도 일으키지 못하는 시스템의 구축이다. 한국의 아이돌 그룹은 분화된 팬덤을 겨냥해 섬세하게 기획되고, 혹독하게 훈련되며, 능숙하게 활동한다. 모든 그룹들이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분화된 팬덤만큼이나 다르게 조율된 서사와 역할이 있다. 이 세계에서 그룹의 개성은 고유함이라기보다 다른 그룹과의 차별성, 그를 통해 창출할 수 있는 팬덤과 경제적 가치의 다른 이름일 따름이다. 초기 기획사 시스템을 경험한 '댄스가수 유랑단' 멤버들이 가끔 내뱉는 그 시절의 고투는 이 시스템의 구축이 고유한 잠재력 있는 젊은이들을 특정한 틀에 맞춰 제조하는 쉽지 않은 과정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케이팝만 이럴까? 입시에서의 성공도, 대학에서의 스펙 쌓기도, 사회에서의 취직도 별반 다르지 않다. 각 영역마다의 매트릭스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 한국인에게 케이팝은 우리 시대의 우화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댄스가수 유랑단'이라는 일견 시대착오적인 시도는 그래서 신선하다. 레트로 유행에 편승하는 또 하나의 기획으로 그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원래 '유랑단'이 유교 가부장제 시대에 그 바깥을 노닐던 이들의 이름이기도 했음을 상기하며 이 프로그램이 여성 연예인 잔혹사와 기획사 매트릭스를 넘어서는 시도이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