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조 원 규모 국부펀드 조성을 두고 필리핀이 시끄럽다. 금융기관 출자와 대규모 개발을 통해 침체된 경제를 되살리겠다는 취지로 이례적으로 빠르게 진행됐지만, 정치인들의 배만 불리는 ‘쌈짓돈’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 일가의 20년 넘는 부패 전력은 의심을 부추겼다.
1일 AFP통신에 따르면, 필리핀 의회는 5,000억 페소(약 11조7,500억 원) 규모 국부펀드 조성 법안을 통과시켰다. 마르코스 대통령이 서명하면 발효된다.
정부는 조성된 펀드를 사회간접자본 확대에 투입해 경제 성장과 일자리 창출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구상을 제시했다. 펀드 조성을 주도한 마크 빌라 상원의원은 “경기 침체 시기에 재정 부담을 완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야당과 시민단체는 “국부펀드는 부패 통로가 될 것”이라고 반발했다. 이들은 법안 발의와 처리 과정이 의심스럽다고 지적한다. 해당 법안은 대통령 아들인 페르디난드 샌드로 알렉산더 마르코스 3세 하원의원, 대통령 사촌이자 하원의장인 페르디난드 마틴 로무알데스 등 마르코스 일가가 주도적으로 냈다.
마르코스 대통령 역시 지난해 11월 법안 논의가 시작된 이후 “기금이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 실행을 가속화하는 성장 촉매제가 될 것”이라며 의회를 압박해 왔다. 필리핀에서 법안 처리는 통상 1년 가까이 걸리지만, 국부펀드 조성법은 반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마르코스 가문은 20년 동안 장기집권한 ‘아버지 마르코스(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 재임시절 천문학적 뒷돈을 챙겼다. 현지 언론들은 그가 정권을 잡았던 1965~1986년 사이 그의 일가가 부정 축재한 재산이 약 100억 달러(약 13조 원)이고, 부동산세 탈세 총액은 약 230억 페소(약 5,400억 원)에 달한다고 추산한다.
일부 선진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는 보안상의 이유로 국부펀드 투자 대상, 자산운용 규모와 보유 자산 유형, 수익률 등을 비밀에 부친다. 이것이 권력자들의 자금 유용 통로로 악용될 수 있다는 게 시민단체의 지적이다.
'마할리카 투자기금법'이라는 법안 이름도 석연치 않다. 필리핀어로 사회 부유층을 의미하는 ‘마할리카’는 아버지 마르코스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이 지휘했다고 주장한 게릴라 부대다. 진보 정당 아크바얀은 성명을 내고 “국부펀드는 국가 최대 규모 투자 사기”라며 “절대 투자해선 안 된다”고 촉구했다.
자금 위험성에 대한 우려도 크다. 미국 시사주간 타임은 “통상 국부펀드는 국가의 천연자원, 특히 석유·석탄 같은 원자재 수익으로 자금을 조달하는데, 필리핀은 중앙은행과 정부 소유 은행, 민간 금융회사의 투자금으로 재원을 마련하는 방식”이라고 전했다. 또 에머슨 산체스 호주국립대 공공정책대학원 사회인프라연구소 연구원을 인용해 “이런 자금 조달 전략은 (부채) 위험이 크다”고 덧붙였다.
이번 국부펀드가 ‘역대급 부패 스캔들’로 불리는 말레이시아의 ‘1말레이시아개발유한공사(1MDB)’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측면도 있다. 나집 라작 전 말레이시아 총리는 2009년 취임 직후 국부펀드 1MDB를 만들었다. 말레이시아 석유를 담보로 자본을 유치한 뒤 경제개발사업을 하겠다는 목적이었지만, 2015년 45억 달러 이상이 나집 전 총리 등의 계좌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불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