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가 4일 입수한 가상자산 '유동성 서비스 계약서'를 살펴본 코인 발행업체 관계자의 총평이다. 이 계약서는 코인 다단계 판매업자로 알려진 A씨가 코인 발행업체와 유동성 공급 계약을 맺을 때 사용됐다. 계약서를 본보에 제공한 제보자는 A씨가 국내 주요 가상자산 거래소인 빗썸과 코인원에 상장된 다수 코인들의 시세조작에 관여했다고 전했다. 발행업체와 계약을 맺고 다단계 및 텔레마케팅(TM) 방식으로 불특정 다수에 코인을 판매해 인위적으로 매수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가치 없는 코인이지만 비싼 가격에 사주는 이들이 있다면 코인 가격은 오를 수밖에 없다.
A씨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가 지난 2월 발행업체와 짜고 시세조종을 통해 105억 원을 챙긴 리딩방 사기조직을 적발했을 당시에도 수사선상에 올랐다. 이 코인 발행업자는 A씨가 자전거래를 통해 해당 코인의 거래량을 부풀렸고, 리딩방 조직으로부터 35억 원어치 코인을 넘겨받아 다단계 방식으로 판매해 수익을 올렸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이 코인으로 수십억 원의 이익을 봤지만, 정작 피해자들은 A씨의 존재를 몰랐다. A씨가 발행업체와 계약해 차명 계정으로 시세조작을 하며 돈을 챙겼기 때문이다.
계약서를 보면 코인 시세조작 정황이 곳곳에 드러난다. A씨 측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해선 "제공자가 자체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마켓메이킹(MM)'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명시했다. 봇(Bot) 프로그램을 활용해 자전거래(거래량을 부풀리기 위해 동일 주체가 사고파는 것)나 통정거래(가격을 정해놓고 코인을 거래하는 것)를 하겠다는 의미다. 계약서에 명시된 서비스 범위에는 △유동성 및 물가관리 서비스 △MM에 관한 전략 수립 항목이 있는데, 법률 전문가들은 시세조작을 의미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계약서를 검토한 법무법인 대건의 한상준 변호사(테라·루나 사건 피해자 측 변호인)는 "봇을 통해 코인을 자전거래하고 '펌프 앤 덤프(고점 매도)' 하는 것은 형법상 사기에 해당한다는 판례가 많아지고 있다"며 "코인 발행업자들의 마지막 출구 전략이 MM을 통한 수익 창출이기 때문에 다수의 피해자가 양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계약서의 '제공자(MM)의 서비스는 사기 등 범죄 구성요건에 해당되지 않도록 운영·제공돼야 한다'는 문구에 대해선 "시세조작 행위에 대한 수사가 진행됐을 때 발행업체를 안심시키기 위해 들어간 조항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계약서는 MM 측에 유리하게 작성됐다. 통상 코인 시장에선 MM업체가 발행업체보다 '갑'으로 통한다. 코인 가격을 띄우려면 자본이 필요한데 MM업체에서 이를 부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수익을 분배할 때도 MM업체가 투입한 자본 비율에 따라 7대 3이나 6대 4로 정하는 경우가 많다. 제보자는 "시세조작 시 거래 수수료가 없는 발행업체의 거래소 계정을 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A씨는 별도 계정들을 이용해 MM 작업을 하겠다고 계약서에 명시했다"며 "이럴 경우 발행업체 입장에선 정보 접근이 제한돼 수익 정산 때 불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계약서에는 MM 업체를 위한 면책 조항도 있었다. 기술적 오류나 유사 사고가 발생할 경우 MM 의무로부터 일시적으로 벗어난다는 것이다. 여기에 '토큰 가격 변화에 대해 어떠한 경우에도 책임지지 않는다'며 보증 면책 조항도 넣었다. MM 작업은 하겠지만, 그 결과는 책임지지 않겠다는 의미다. 한상준 변호사는 "면책 조항이 있는 것 자체가 발행업체 입장에선 독소조항"이라고 꼬집었다.
A씨와 MM 계약 체결을 검토했던 한 코인 발행업자는 "A씨가 다단계 방식으로 코인을 팔아 돈을 많이 벌었다며 MM 계약을 제안한 적이 있다"며 "이를 거부하자 3억~4억 원의 선금을 주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발행업체에 수억 원대 선금을 줘도 계약만 하면 MM 업체에는 충분히 남는 장사라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