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텔 전전하던 소녀가 美 명문 발레단 첫 흑인 수석무용수 되기까지

입력
2023.06.0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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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내가 토슈즈를 신은 이유'
美 ABT 최초의 흑인 여성 수석무용수 미스티 코플랜드 회고록

결혼과 이혼을 반복한 어머니, 다섯 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종종 거처를 잃고 모텔을 전전해야 했던 소녀. 13세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방과 후 활동을 통해 발레를 처음 접한 아이는 훗날 미국 발레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의 첫 흑인 여성 수석무용수가 된다. '발레계의 신데렐라'를 넘어 최근에는 다양한 브랜드의 광고 모델이자 강연가로도 활동 중인 미스티 코플랜드(41)의 이야기다.

최근 번역 출간된 '내가 토슈즈를 신은 이유'는 코플랜드가 2001년 ABT의 코르 드 발레(군무진)에 합류 후 2007년 솔리스트로 승급해 활발히 활동을 이어가던 2014년에 쓴 회고록이다. 인종과 재정 여건, 체형 등 발레를 하기에 불리한 조건을 딛고 정상의 자리에 오른 과정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기록했다.

코플랜드는 아프리카 흑인, 이탈리아계 혼혈인 어머니와 아프리카 흑인, 독일계 혼혈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백인 중심의 보수성이 강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발레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저소득층 청소년에게 방과 후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비영리 민간단체 '보이스 앤드 걸스 클럽' 덕분이었다.

그는 발레를 배운 지 8주 만에 발끝으로 서는 '푸앵트' 동작에 성공하는 등 일찍부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스승인 신디 브래들리와 어머니 사이에 양육권 분쟁이 발생하는 등 프로 발레리나로 자리매김하기까지는 갖은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했다. 중요한 시기마다 크고 작은 부상을 겪었고 때늦은 사춘기로 체형이 달라지며 체중 감량을 강요받기도 했다. 발레리나가 된 후에는 피부색 때문에 시련을 겪었다. 순백색 의상의 발레리나들이 펼치는 군무로 대표되는 발레블랑(백색 발레) '백조의 호수'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캐스팅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코플랜드는 2011년 ABT '불새' 초연의 타이틀롤을 맡는 등 피부색으로 인한 편견을 극복해나간다. 수석무용수로 승급한 2015년엔 '백조의 호수'의 백조 오데트와 흑조 오딜을 연기한 첫 흑인 발레리나가 됐다.

코플랜드는 1960년대에 활동한 미국의 첫 흑인 발레리나 레이븐 윌킨슨(1932~2018)을 언급하면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발레리나로서 내 목적의 일부는 발레계에서 레이븐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사람들에게 우리의 역사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책은 한계를 극복하고 목표를 향해 나가는 도전적 삶의 예시이자 백인의 전유물로 여겨 왔던 고전 발레의 고정 관념에 균열을 내는 시도다. 코플랜드는 책의 마지막 장(章)에 이렇게 적었다.

"내 두려움은 또 다른 흑인 여성이 엘리트 발레단에서 내 위치에 오르기까지 앞으로 20년은 더 걸릴 수도 있다는 우려에 있다."


김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