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만이 우리 엄마보다 네 살 많아". 지난달 21일 이준희(20)씨는 서울 지하철 2호선 신촌역에서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 뒤 일본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 속 정대만 그림이 큼지막하게 그려진 광고판으로 걸어가 사진을 찍었다. 원작 만화에서 1972년 5월 22일생인 정대만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한국 팬들이 지하철 역사에 건 광고가 촬영 배경. '슬램덩크'를 스무 번 넘게 봤다는 이씨는 "일본에 관심이 생겨 올겨울엔 ('슬램덩크' 배경인) 가마쿠라로 여행을 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일본정부관광국과 출입국재류관리청에 따르면 1~3월 일본을 찾은 한국 관광객은 164만 명으로 중국인(15만 명)보다 10배 이상 많았다. 연령대별로는 20대(30%, 49만 명) 방문 비중이 가장 높았다.
"가지 않고 사지 않습니다!" 2019년 일본 상품 불매 운동 때 온라인에 공유됐던 외침이다. 4년이 흐른 요즘 분위기는 180도 달라졌다. 올 1분기 일본을 찾은 외국 관광객 3명 중 1명은 한국인이었다. 노재팬으로 외면받았던 일본산 맥주는 품귀현상이 벌어졌다. '일본 바람'은 대중문화에서도 거세게 불고 있다. 2030세대가 이끈 'J웨이브'가 바꾼 풍경이다.
한국일보가 최근 6개월 동안 새 일본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은 경험이 있는 20, 30대 226명을 대상으로 일본 문화 소비와 일본에 대한 인식을 주제로 온라인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설문 응답자 10명 중 7명(69%)은 노재팬 운동 때 일본 제품을 사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설문 응답자의 81%는 현 일본 정부를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그런데도 일본을 찾고 현지 문화를 즐기는 이유에 대해선 대체로 "일본 정부가 싫은 것이지 일본인과 일본 문화를 싫어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일본 문화는 즐기되 과거사 문제엔 준엄하게 대응하는 게 자연스러운 게 이들 세대다. 무턱대고 수용하는 건 아니다. 김상희(24)씨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단편 '별의 목소리'(2002) 등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지만 제국주의 침략의 이미지(욱일기)를 녹인 '귀멸의 칼날'은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은 일본의 '선진 문화' 수입에 치우치고 일본은 일부 계층만 한국문화를 즐겼던 단계가 한일 문화교류 1.0단계라면 역사와 문화를 분리해 판단하고 상대국의 문화를 유연하게 향유하는 양국 젊은 세대의 등장은 서로가 서로의 문화를 보완재로 여기는 방식으로 문화교류의 양상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높인다. 문화 교류가 2.0단계에 접어드는 셈이다.
젊은 세대가 문화와 역사를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일본에 대한 열등감이 없기 때문이다. 기성세대는 숨죽이며 일본 문화를 소비했다. 일본 문화가 전면 개방되면 우리 문화가 잠식되고 말 것이라는 우려가 컸기 때문.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은 문화 패권국이었고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었다. 또한 "일본 문화는 우리보다 선진국"이라 여겨 열등감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2030은 다르다. 문화와 경제적 영향력이 역전돼 이른바 'K'가 세계의 표준이 된 시대에 자란 이들은 한국과 일본이 대등하다는 인식이 강한 유일한 세대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3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한국팀이 일본에 대패했을 때 이전 같으면 난리가 났을 텐데 젊은 세대는 쿨하게 '게임은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다'고 받아들였다"며 "K컬처 등 '메이드 인 코리아'가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시대에서 자란 2030은 '우리가 더 낫다'는 자신감을 토대로 '일본에도 좋은 게 있네'란 사고로 일본을 소비하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음지에서만 향유되던 일본 문화가 이전과 달리 음원 차트 톱100에 처음으로 등장(이마세)하고 한국에서 상반기에만 총 970관객('슬램덩크' '스즈메의 문단속')을 바라보는 초유의 현상이 벌어진 배경이다. 강태웅 광운대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는 "일본 대중문화 수입이 금지된 상황에서 '우리가 일본보다 30년은 늦었다'는 소리를 듣고 자란 기성세대는 일본 문화를 즐길 때 일종의 죄책감을 느꼈다"며 "'반대로 요즘 2030은 '일본을 따라가야 한다'는 의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일본 문화 소비에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공세적인 외교행보로 반중 정서가 높아진 정세 변화가 2030이 일본에 대한 거부감을 낮추는 데 영향을 끼쳤다는 해석도 나온다. "중국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갖고 있다"는 응답자는 10명 중 7명(73.8%, 동아시아연구원, 2021)꼴로, "일본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갖고 있다"는 비율(63.2%)을 훌쩍 넘어선다. 주은우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과 중국의 젊은 세대 사이 문화 정체성을 둘러싼 다툼이 잦아지고 있다"며 "중국에 대한 비호감도가 최근 너무 높아져 2030의 일본에 대한 호감도가 상대적으로 높아진 것"이라고 봤다.
한국의 2030이 이끄는 J웨이브의 새로운 지류는 '복고 소비'다. 설문 결과 "'슬램덩크'를 비롯해 1970~80년대 유행한 시티팝 등 아날로그 정서가 깃들어 과거를 추억할 수 있게 하는 일본 대중문화를 주로 즐긴다"(39%)는 응답이 최신 J팝 등 트렌디한 일본 대중문화(33%)보다 많았다. 1990년대 X세대가 일본 최신 유행을 따라 했던 1세대 J웨이브와 결이 다른 Z세대의 특징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사회적 도태에 대한 불안감이 커진 2030이 '거품경제' 분위기 속에 낭만과 풍요로 상징되는 일본 옛 대중문화를 적극 소비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은 "2030에 새로운 유행으로 떠오른 영화 '러브레터'(1999)와 시티팝 등 옛 일본 대중문화가 제공하는 감각은 도시적 권태로움"이라며 "경제적 고도성장 이후 성장 둔화기와 문화적 풍요로움이 교차하는 지금 한국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측면이 있어 2030을 중심으로 일본 문화 복고 소비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창민 한국외대 융합일본지역학부 교수는 "일본 문화가 개방된 1998년 이후 태어났거나 그 시절 청소년기를 경험한 2030은 어릴 때부터 일본 문화를 자연스럽게 접하며 살아왔고 부모님과 일본 여행도 많이 해 본 세대"라며 "이런 성장 배경에서 자라 노스탤지어를 느낄 수 있는 조건들이 갖춰진 것"이라고 평했다.
반면 일본 2030의 한국 소비 방식은 다르다. K팝 그룹 르세라핌의 일본인 멤버 미야와키 사쿠라(25)와 나카무라 가즈하(19)는 일본 청년들이 한국에 왔을 때 인증 사진을 가장 많이 찍는 곳으로 뷰티숍 'S'의 간판 앞과 모바일 캐릭터 매장 'L'의 곰 인형 앞을 꼽았다. 일본 2030은 패션과 IT 문화를 비롯해 K팝과 드라마 등 한국의 최신 유행을 즐기고 있다. 한국의 청년은 일본 문화의 과거를, 일본 청년은 한국 문화의 현재를 소비하는 양상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국적과 상관없이 다양성을 중시하는 게 2030"이라며 "한일 젊은 세대들이 보완재로서 양국의 문화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즐기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