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의 ‘반미 행보’가 심상치 않다. 미국 등 서방의 잇단 제재로 고립 상태였던 베네수엘라의 국제무대 복귀를 지원 사격한 데 이어, 남미국가연합(UNASUR·우나수르) 정상회의로 남미의 국가수반들을 한데 모으기도 했다. 제2의 '핑크 타이드'(좌파 정부 연쇄 집권)를 맞은 중남미 국가들이 속속 ‘탈(脫)달러 대열’에 가세하고 있는 터라, 이번 회의가 탈미국 선언의 발판이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29일(현지시간) AP통신·AFP통신 등에 따르면, 룰라 대통령은 이날 브라질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마두로 대통령은 2018년 대선 승리로 재집권에 성공했으나, 미국 등 60여 개국이 ‘독재자에 의한 부정선거’라며 전방위 제재에 나서면서 국제적인 '왕따'가 됐다. 브라질도 ‘친미 우파’인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 시절엔 베네수엘라와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이런 상황에서 룰라 대통령이 이튿날 남미 정상회담에 앞서 마두로 대통령과 별도 회동을 했다는 건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실제 룰라 대통령은 마두로 대통령에게 부쩍 힘을 실어 줬다. 그는 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마두로 대통령이 여기에 온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의 복귀 시작이라는 점”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다른 나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 국가에 900개의 제재를 가하는 건 이해할 수 없다”며 미국 정부를 비판했다. 이를 두고 현지 매체에서조차 ‘단순한 외교적 수사’라 하기엔 과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브라질리언리포트는 “마두로 대통령에 대한 룰라 대통령의 과장된 칭찬은 외교적 정중함을 훨씬 뛰어넘었다”고 전했다.
룰라 대통령의 ‘베네수엘라 껴안기’는 브라질이 주도하는 중남미의 ‘탈달러 움직임’과 연관이 있다. 브라질은 지난 3월 중국과의 무역에서 달러 대신 위안화 및 브라질 헤알화를 쓰기로 합의하는 등 중남미에서 위안화 거래 확대의 포문을 열었다.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 국가들은 위안화 확대와 더불어 공동화폐 도입을 통해 달러 의존도를 줄이려 하고 있다.
30일 브라질리아의 이타마라치 궁전에서 열리는 남미 정상회의에서도 관련 논의가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남미 지역 12개국 정상급 인사들이 참석하는 이 회의 개최는 2014년 이후 9년 만으로, ‘남미 좌파의 대부’로 불리는 룰라 대통령이 주도했다. 지난해 11월 대선 승리로 재집권에 성공한 그는 ‘우나수르 재건’을 목표로 삼았다.
1차 핑크 타이드 때인 2008년 남미 12개국이 모여 출범한 반미 성향 협의체다. 한동안 중남미에서 우파 정권이 잇따라 들어서며 유명무실해졌지만, 2018년 멕시코를 시작으로 브라질과 콜롬비아 등에서 좌파 정부가 들어서며 사정이 달라졌다. 2차 핑크 타이드와 함께 부활한 것이다. 현지 매체 브라질리포트는 “룰라 대통령이 남미 정상회담에서 남미의 모든 국가를 하나로 모으는 ‘협력기구 신설’ 등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목적은 결국 탈달러, 그리고 탈미국이다. 룰라 대통령은 “(이번 회의에서) 중요한 아이디어는 우리가 함께 협력할 블록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어 “미국에 속한 달러에 의존하지 않고도 사업을 할 지역의 공동화폐를 갖고 싶다는 ‘꿈’이 있다”며 달러에 대항하는 지역 공동 통화 구상을 논의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브라질이 이날 베네수엘라의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가입 지원 의사를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흥 경제국 5곳의 모임인 브릭스는 중국 주도하에 세력권을 넓히면서 주요 7개국(G7) 위주의 세계 질서에 도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