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모는 중앙아시아 출신 노예였나

입력
2023.05.30 04:30
15면
<22> 다빈치 생모를 둘러싼 논란들


편집자주

아무리 유명한 예술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엄마는 중앙아시아 출신의 노예였다?

지난 3월 14일, 이탈리아의 한 기자회견 소식이 전 세계 언론에 보도되었다. 외신들은 유럽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중앙아시아 코카서스에서 팔려온 노예 여성의 아들'이라며 앞다투어 보도했다. 이날 기자회견은 나폴리대학의 카를로 베체 교수가 그간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출간한 소설 '카테리나의 미소'에 대한 것이었다. 베체 교수는 2019년에 피렌체의 고문서들을 살펴보던 중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노예해방문서 하나를 발견했다. 1452년 11월 2일 자로 작성된 이 문서는 ‘모나 지네브라’라는 여주인을 대신하여 노예 ‘카테리나 디 레오 리피’라는 25세의 여성을 해방한다는 내용이었다. 문서에는 카테리나가 중앙아시아의 코카서스 지역에서 태어나 이탈리아로 인신매매되었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문서 공증인은 피에로 다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아버지였다. 작성 시기가 레오나르도 생후 6개월 무렵이라는 점, 여기에 피에로의 전에 없던 사소한 오타와 실수가 어떤 감정적인 동요라고 유추한 베체 교수는 이 문서가 레오나르도의 생모에 대한 증거라고 확신했다.


중국인 노예설 vs. 가난한 고아 소녀설

레오나르도의 출생에 대한 그동안의 학계 정설은 법률가 집안의 피에로 다빈치와 하층민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외자(사생아)라는 사실뿐이었다. 친모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여 오랫동안 엎치락뒤치락 논쟁이 있었다. 2014년 이탈리아 소설가 안젤로 파라티코는 ‘모나리자’의 실제 모델은 중국인 노예였던 어머니 카테리나라고 주장했다. 당시 유럽으로 팔려온 동양계 노예가 존재했고, 대부분 개종하면서 ‘카테리나’라는 이름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파라티코는 모나리자 얼굴이 동양인을 닮았고 배경이 산수화처럼 보인다며, 레오나르도가 왼손잡이에 채식주의자인 것이 중국인 어머니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고, 심지어 동양인에 대한 편견과 오해라는 비판도 많았다.


‘중국인 노예설’은 그 이듬해, 세계적 권위의 다빈치 연구자 마틴 켐프가 새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바로 정리되었다. 옥스퍼드 대학의 마틴 켐프 교수는 다빈치 가문의 세금계산서, 거래내역서 등을 조사하여 다양한 증거를 확보하였다. 레오나르도의 아버지 피에로 다빈치가 카테리나라는 여성을 인근 지역의 평민과 결혼할 수 있도록 주선했고, 카테리나의 새 남편에게 자금을 융통해 준 기록은 둘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이 외에도 레오나르도의 자필 노트에서 ‘1494년 밀라노에서 카테리나가 와서 머물다’라는 기록과 레오나르도가 카테리나의 장례 비용을 지불했다는 메모도 확인되었다. 켐프 교수는 “다빈치의 생모 카테리나는 부모 없이 할머니와 어린 동생을 가족으로 둔 하층민 여성이었고, 레오나르도는 친할아버지의 집에서 성장했음은 분명하다”면서 카테리나가 노예는 아니라고 보았다. 이후 한동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모 노예설은 잠잠했다.

그랬다가 지난 3월 베체 교수의 발표로 다빈치의 생모가 이국 출신의 노예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빈치의 생모가 코카서스 노예라는 이야기는 가능성 높은 심증일 뿐, 물증이 없는 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지위를 획득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이유로 이번에 카테리나 노예 해방 문서를 발견한 베체 교수는 학술 논문 대신 허구적 상상력과 추정이 허용되는 소설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다빈치 생모 논란의 세 가지 이유

이쯤 되면 새로운 질문이 생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엄마가 누구이고 어느 인종이며, 어떤 신분이었는지 밝히는 게 과연, 어째서 중요한 일인가? 이 의문과 관련하여 고려해야 하는 다음의 세 가지 문제가 있다. 다빈치의 생모 추적에 우리가 흥미를 가지고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 인종과 민족에 대한 선입견 문제

‘인종, 민족, 국민’은 각기 다른 정의를 가지고 있다. 인종(race)은 18세기 독일의 인류학자 블루멘바흐가 백인을 정의하면서 만든 말이다. 현재는 4개 종(코카소이드, 몽골로이드, 니그로이드, 오스트랄로이드)과 다수의 혼혈종으로 구분하고 있다. 남아메리카 지역은 백인, 흑인, 황인이 섞이며 발생한 혼혈종이 있으며, 중동 및 중앙아시아 지역은 과거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동하면서 섞인 다양한 혼혈종이 존재한다. 학자들은 DNA 조사를 해도 명확한 인종 구분은 어렵다고 보는 편이다. 순수 한국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의 DNA 결과를 보면 코카소이드, 니그로이드 계열의 유전인자가 확인된다. 민족이란 언어적, 문화적 동질성을 가진 집단으로 영어로는 에스니스티(ethnicity), 즉 부족, 씨족이라는 개념이다. 여기에 어족, 국민이라는 개념까지 함께 놓고 본다면, 15세기 누군가의 인종, 민족 구분이 어렵고 명확하지 않다. 다빈치의 생모가 중앙아시아 코카서스 출신의 노예라고 해서 아시아인 또는 러시아인으로 구별할 수 없다. 많은 학자들이 이번 베체 교수의 코카서스 노예 주장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는 이유다. 지난 3월 베체 교수의 소식을 전하는 이탈리아 언론보도에 “다빈치는 반쪽짜리 이탈리아인이었다!”라는 타이틀이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다. 민족 개념이 한국사람들만큼이나 강한 이탈리아 사람들의 반응답다고 느꼈다.

2. 노예에 대한 선입견 문제

노예제도는 모든 시대, 모든 지역, 모든 국가에 존재했다. 사람을 ‘재화’처럼 다루는 것이 노예의 정의다. 시작은 전쟁 포로들이었다. 적국의 포로는 일종의 전리품으로 대부분 인종적, 문화적으로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의 노비 제도는 특이하다. 조선의 노비는 중세유럽의 농노와 노예의 절충적 존재에 가까웠다. 조선 개국 당시 노비는 전체 인구의 4% 수준이었는데, 100년 후 40%로 늘었다. 양반들은 노비 증가를 원했지만, 국가 차원에서는 납세의무가 없는 노비의 증가는 재정적 문제가 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병사 및 세수 확보를 위해 점차 노비가 줄기 시작했고, 조선 말기에는 노비해방문서 ‘면천첩’ 거래가 성행하면서 노비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였고, 1894년 노비제도가 폐지되었다. 현재 한국인의 거의 절반은 조선 전기 시대에 한때 노비로 살았던 사람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

한반도에 노비가 가장 많았던 15, 16세기, 유럽에서도 노예가 본격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이티 지역을 발견한 후, 스페인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끌고 와 이 지역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였다. 학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예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시작하자 농장주들은 자살예방을 위해 “자살하면 좀비가 된다”는 이야기를 지어 퍼트렸다는 것이 이른바 '좀비' 기원설이다. 이후 1791년 ‘아이티 노예해방 혁명’으로 지금의 아이티가 세워졌다. 우리가 영국 명예혁명이나 프랑스 대혁명은 기억하지만, 사실상 세계사에서 가장 놀라운 혁명이라 부를 수 있는 ‘아이티 노예해방 혁명’은 낯설다. 백인 중심으로 서술된 세계사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선시대 양반 중심의 역사를 더 잘 기억하는 것과 비슷하다. 한국인들 대부분이 나의 조상이 노비일 수 있다고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다빈치의 생모가 노예라는 이야기에 재미와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나의 역사’가 아닌,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타인의 역사’라는 시선 때문일지도 모른다.

3. 천재와 모성에 대한 신화 문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천재성은 그가 남긴 수천 페이지 노트를 통해 이미 확인되었다. 모든 학문 분야를 다 건드리며 그 많은 기록을 남겼음에도 그는 개인적인 기록은 거의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궁금해진다. 그중에서도 ‘모나리자’를 둘러싼 많은 루머는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모나리자’는 20세기 초까지 그다지 주목받지 않다가 이탈리아 출신 직원이 그림을 훔친 이후부터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 되었다. 당시 도난범은 이탈리아에서 영웅시되었지만, 정작 다빈치는 고국 이탈리아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자신을 추앙하는 프랑수와 1세의 프랑스로 이주하여 거기서 숨을 거두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모나리자’를 수십 년 동안 분신처럼 가지고 다녔던 탓에 결국 루브르미술관에 남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도난 사건만으로 모나리자가 유명해진 건 아니다. 선과 색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스푸마토(sfumato) 기법을 적용한 독창성, 동시대 초상화에는 없던 구도적 창의성 등 ‘모나리자’가 갖는 미술사적 의미는 압도적이며 ‘명화’라는 지위도 마땅하다. 이러한 작품을 남긴 천재 화가가 실제로 어떻게 성장했고, 무슨 교육을 받았으며,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창작을 했는지 연구하는 일은 분명 학술적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 새롭게 밝혀진 다빈치의 생모 이야기는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을까? 켐프 교수가 지적했듯이 다빈치 생모 문제 자체는 미술사적으로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오히려 15세기 이탈리아 노예사 연구에 도움 되는 사료적 가치, 또는 창의성이 높은 예술가 양육과 관련한 교육학적 논의가 가능하다. 프로이트 심리분석 측면에서 코카서스 노예 출신 어머니가 ‘모나리자’의 모델일까 하는 연구도 가능하겠다. 그런데 15세기 이국의 노예 여성이 혼외자 자식에게 과연 영향을 끼칠 수 있었을까? 당시 대부분의 중상류층 아이들은 유모의 손에 길러졌고, 레오나르도 역시 조부의 집에서 성장했다. 생모인 어머니가 정서적, 교육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보는 관점은 “엄마가 아이를 키운다”는 현대적 시선이다. 다빈치가 동시대인들과 달랐던 이유를 문화와 신분이 달랐던 엄마 때문이라고 보는 관점의 이면에는 ‘모성 신화’가 있다.

천재 예술가였기에,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작품을 만들었기에 창작자의 개인적 삶 전부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은 자칫 지나친 ‘작가주의’가 될 수 있다. 창작자의 개인적 삶에 대한 이해는 분명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는 창작자의 작품은 그 가치가 줄어드는가? 창작자가 배제된 작품의 감상은 불가능한가? 더 나아가, 범죄행위 경력이 있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준 행동을 했던 예술가의 작품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다양한 답변이 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모 논란은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를 생각하게 해 주는 좋은 사례임에는 틀림없다.




미술교육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