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선 그거 갖고 다니는 사람 거의 없을 거예요."
실리콘밸리에 온 지 며칠이 지났을 때, 처음 만난 한 빅테크 직원에게 종이 명함을 건네자 돌아온 말이다. 어색하게 기자의 명함을 받아든 그는 자기 명함 대신 링크드인(Linkedin·직장인 인맥관리 서비스) 애플리케이션의 QR코드를 켜서 들어보였다. 본인 계정과 연결된 코드로, 링크드인 친구 추가를 해달란 뜻이었다. 한국에서 명함 수백 장을 가져오며 '빨리 다 써버라면 어쩌지'라고 생각했던 게 괜한 걱정이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습관처럼 항상 가방에 넣어 다니던 새 명함 박스는 그날부로 서랍에 들어갔다. 누군가를 만나면 명함을 내미는 대신 링크드인 계정이나 이메일 주소를 묻는 게 점차 익숙해졌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그 맛을 보고 나니 '명함을 나누지 않는 삶'에 장점이 많았다. 어떤 업무를 맡고 있는지, 그 일은 얼마나 했는지, 전에는 무슨 일을 했는지 등 물어보기 불편했던 질문을 굳이 할 필요가 없어졌다. 링크드인만 보면 다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버리기도, 마냥 쌓아두기도 어려웠던 명함 꾸러미를 바라보며 더는 고민하지 않게 된 것도 수확이다.
그러나 거의 쓸 일이 없어진 명함도 가끔 필요할 때가 있는데, 한국에서 온 사람을 만날 때다. 방금 전까지 '친환경 경영'에 대해 힘껏 강조하던 어느 회사 사장님이, 누구나 검색하면 알 수 있는 정보만 적혀 있는 종이 명함(심지어 연락처도 없다)을 건넬 땐 한국이 명함 사회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얼마나 쓰는 사람이 없었으면 '국민 메신저' 카카오톡의 명함 교환 서비스가 1년 여 만에 조용히 종료됐을까. 삼성전자 갤럭시 스마트폰의 기본 기능 중에 명함 교환과 같은 역할을 하는 '프로필 공유'가 있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생각해보면 한국같은 정보통신 강국에서 아직도 종이 명함이사랑받는 건 의아한 일이다.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해 '종이 없는 사무실'이 확산하는 흐름과도 배치된다. 우리는 왜 여전히 종이 명함을 쓸까. 좋은 점이 많아서라기보다는 계속 그래 왔고, 다들 그러기 때문이 아닐까.
적어도 상대에게 명함 주는 행위를 '예의'와 동일시하지만 않는다면 종이 명함은 빠르게 없어질 수 있을지 모른다. 명함도 사실은 한 번 받고 저장하면 다시 볼 일이 많지 않은 그냥 종이일 뿐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