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이 있었기에... 청각장애인 '팬데믹 길잡이' 돼 준 수어통역사

입력
2023.05.2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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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본 브리핑 통역 김동호 수어통역사] 
"전문 의학용어, 신속·정확 전달 쉽지 않아"
"수어통역, 농인·세상 소통 끈 잇는 버팀목"
"수어 인식 변화 보람... 아직은 갈 길 멀어"

손과 손가락이 춤을 췄다. 폈다 접기를 반복하고 턱과 가슴을 분주히 오갔다. 현란한 손동작을 풀어써 보니 이런 문장이 완성됐다.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김동호씨는 ‘수어(手語)통역사’다. 내달 1일부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 경보가 ‘심각’에서 ‘경계’로 낮아지고, 확진자 격리도 7일 의무에서 5일 권고로 바뀐다. 오랜 시간 우리 일상을 괴롭힌 감염병과의 결별과 기쁨을 수어로 표현한 것이다.

코로나19는 많은 어려움을 초래했고, 또 많은 걸 바꿨다. 수어 통역도 그랬다. 그는 코로나19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브리핑 자리를 지킨 여섯 명의 수어통역사 중 한 명이다.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정례브리핑에 수어 통역이 제공된 건 처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국민이 마스크로 얼굴을 꽁꽁 싸맨 탓에 표정과 발음으로 소통하는 청각장애인들에게 고통은 더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이 기간 수어통역사들은 기꺼이 41만(2021년 기준) 청각장애인들의 길잡이가 돼 줬다. 김 수어통역사를 18일 만나 지난 3년여의 보람과 고민을 들어봤다.

감염 위험에도... 농인 위해 마스크 던져

전례가 없었기에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초반 수어 통역은 고난 그 자체였다. 정부 당국자가 쉴 새 없이 쏟아내는 전문 의학용어를 실시간, 그것도 정확하게 설명하기란 사실 불가능했다. “‘아스트라제네카’라는 단어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생방송 중이라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론 진땀을 흘렸어요.”

김 통역사는 일단 글자 그대로 전달하는 데 집중했다. 가령 코로나의 경우 ‘ㅋ’ ‘ㅗ’처럼 음소로 세분화해 통역하는 식이다. 브리핑이 끝나면 좀 더 쉬운 표현을 찾기 위해 사전을 뒤졌고, 통역사들끼리 토론도 했다. 국립국어원 산하 위원회 ‘새수어모임’에 단어에 대응하는 공식 수어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역학조사’ ‘코로나 우울’ ‘비말 차단용 마스크’ 등의 수어는 이렇게 탄생했다.

수어는 그저 손만의 언어가 아니다. ‘표정의 언어’이기도 하다. 통역사가 손동작과 함께 감정을 충실히 얼굴에 드러내야 의미의 왜곡을 최소화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마스크는 큰 장벽이었다. 김 통역사는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마스크를 과감히 벗었다. 수어를 제1 언어로 사용하는 청각장애인, ‘농인’들을 위해서였다. 이들에게는 수어통역사가 세상과 소통의 끈을 잇는 버팀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중대본 관계자들에게 바이러스를 옮기지 않을까 부담도 컸고, 브리핑을 마칠 때마다 녹초가 됐다”고 회상했다.

고단함의 결실은 컸다. 통역 장면이 매일 전파를 탄 덕인지 수어에 대한 인식이 바뀐 걸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수어하는 모습을 한결 편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수어를 배우려는 청인(聽人)이 크게 늘었습니다.” 청인은 음성 언어를 사용하는 비(非)장애인이라는 의미로 농인의 상대어로 사용된다. 장애와 비장애를 나누지 말고 개인의 특성 차이에 주목하자는 취지다. 실질적 변화도 있었다. 2020년 팬데믹 첫해, KBS는 지상파 최초로 오후 9시 뉴스 수어 통역을 시작했다. 지난해 제20대 대선 개표방송에선 지상파 방송 3사 모두 수어 통역을 제공했다. 또 통역이 제공된 브리핑 영상엔 어김없이 “모든 국민에게 코로나19 정보를 알 수 있게 해줘 감사하다”는 댓글이 줄을 이었다.

"소통 방식 차이 받아들이는 사회 됐으면"

그늘도 물론 있었다. 선별진료소 등 의료시설에 수어통역사가 배치되지 않는 등 온전한 권리를 보장받기 힘든 농인의 현실을 여실히 드러냈다. 직접 통역사를 데려가도 감염을 이유로 막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인터뷰에 동행한 농인 이재란 서울수어전문교육원 수어전문 강사는 “선별진료소나 병원에서 언제 부르는지 몰라 몇 시간씩 기다리곤 했다”며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청각장애인이 원하는 소통의 세상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수어통역사 수도 적고, 시민들도 통역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못한다. 행사에 수어통역사를 부르고는 방송 화면에선 빼거나 연설자 말이 들리지도 않는 먼 거리에 배치하는 등 생색만 낼 때도 많다. 김 통역사는 “수어가 공용어라는 인식 부족에서 생기는 잘못”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농인에게 한국어가 아니라 ‘한국 수어’가 공용어란 사실이 받아들여지는 날을 꿈꾸고 있다. 수많은 농인들이 어릴 때부터 가정 안팎에서 소리 내서 말을 하도록 강요받는다. “농인과 청인은 소통 방식 자체가 다르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사회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그것이 변화의 시작입니다.”




장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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