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것'. "온다 간다 말없이 와서 / 오도 가도 못하게 발목을 붙드는, / 손을 뻗으니 온데간데없는"
인생이 그렇다. 아니, 사랑이 떠나는 순간도 그랬던가. 다시 보니 봄이라는 계절의 얘기 같다. 삼행의 짧은 시를 읽으며 '그것'의 정체를 파고든다. 오은(41) 시인의 신작 시집 '없음의 대명사'를 읽는 건 수수께끼를 푸는 듯하다. 그곳, 그것, 그, 우리 등 대명사를 제목으로 삼은 시 58편이 실린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답을 찾아 헤매다 보면 불현듯 상념이 스치고 감정이 흔들린다.
25일 전화로 만난 오은 시인은 "명명하기 애매한 것을 대명사로 써 내려가다 보니 제목 자체를 대명사로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대명사 제목의 시를 집중적으로 쓰기 시작한 계기를 설명했다. 제목은 시의 길잡이가 될 수도 있지만 시를 가둘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봄'이라는 시의 제목을 '그것'으로 수정한 순간 독해는 풍부해졌다. "다양한 정답을 가진 수수께끼처럼, 독자가 열 명이면 열 명에게 다 다르게 읽히는 게 좋은 시 아닐까 싶어요."
'없음의 대명사'는 2002년 등단한 그의 여섯 번째 시집이다. '나는 이름이 있었다' 이후 5년 만이다. 구성을 먼저 기획하고 써 내려가 완성한 시집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인지 이전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물론 그간 앤솔러지, 산문집, 청소년 시집 등을 꾸준히 냈다.) 의도한 대로 대명사로 무한한 공간을 만들어 낸 방식은 독자를 자유롭게 했다. 그 공간에 각자의 이야기를 삽입하고 재현해내며 자기만의 시로 바꿔내는 여정에는 지루할 틈이 없다.
시집 전반은 상실의 감각을 끌어안고 있다. "없음은 있었음을 끊임없이 두드릴 것"이란 시구는 시어들 사이로 비치는 슬픔을 이해하게 한다. "언젠가부터 한 사람의 삶을 생각하고 죽음을 추모하는 자리에 더 많이 가게 되더라"는 시인은 자연스레 "그가 있었기에 느꼈던 감정들이, 그가 지금 없다고 해도 무용하거나 없었던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없다는 건 있었다는 의미고, 없다고 말함으로써 지금 여기 다시 있을 수 있다.
시집의 제목은 그런 메시지를 잘 담아냈다. 말 그대로 무엇을 대신 지칭하는 품사라는 뜻으로 제목 속 '대명사'를 바라보자. 무엇도 '없음'을 대신 지칭하지 못할 것 같지만 '없음', 그러니까 있었던 것의 흔적을 새겨나간 문장들의 시 자체가 곧 '없음의 대명사'일지 모른다. 오연경 문학평론가는 "시인의 대명사는 잃어버린 것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있게 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혹은 '부(富)의 대명사'라는 표현처럼 '대명사'를 어떤 속성을 대표한다는 의미로 본다면 '없음의 대명사'는 곧 삶일 수 있다. 있었던 것, 흘러가는 것, 잃어버리고 잊어버릴 그 모든 것이 생(生)이기에.
시는 이런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 "매일 밤 상처를 입고 옷을 벗었다 매일 아침 상처 입은 옷을 입"('그것들' 21쪽)는, "내 앞에서도 노력하지 않으면 웃을 수 없"('나' 135쪽)는 그런 이들. 그들에게 가닿은 시는 쉼표가 된다. "갔다,고 말했다 / 갔다 다음에 쉼표를 찍지 않으면 / 숨 막힐 것 같았다 // 도저히 혼자 힘으로는 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다"('그것' 57쪽)
오은의 글맛은 여전하다. 단어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것을 시인의 역할로 여기기에, 그 책임을 다하려 했다. "된소리는 소리가 이미 됐다는 소리야 / 무슨 소리야 완성이 됐다고? // 된 사람처럼 모질고 우악스럽다고 / 다 된 밥에 재 뿌리겠다고 작정한 소리라고 // 꼴통을 봐 / 쓰레기를 봐 / 빨갱이를 봐"('그것들' 25쪽) "거울이 말한다 / 보이는 것을 다 믿지는 마라 // 형광등이 말한다 / 말귀가 어두울수록 글눈이 밝은 법이다"('그곳' 12쪽)
또 다른 시인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물었다. "한발 늦게 도착하지만, 그랬기에 (앞선 이들이) 놓친 것을 주섬주섬 모으는 이가 시인이 아닐까요." 묵묵히 곱씹은 후 건넨 글로, 상대가 상념에 잠기기도 하고 그때의 감정을 다시 보게도 만드는 자. 그래서 오은은 앞으로도 지각 아닌 지각을 할 작정이다. 덕분에 우리는 '잃었다'의 자리에 있었던 '있었다'를 다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