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 악화시키는 폭염… "선진국, 피해 보상해야"

입력
2023.05.25 04:30
17면
<3> 이른 무더위, 불타는 동남아
[동남아 기후 전문가 ‘폭염’ 인터뷰]

편집자주

2023년 2월 한국일보의 세 번째 베트남 특파원으로 부임한 허경주 특파원이 ‘아세안 속으로’를 통해 혼자 알고 넘어가기 아까운 동남아시아 각국 사회·생활상을 소개합니다. 거리는 가깝지만 의외로 잘 몰랐던 아세안 10개국 이야기, 격주 목요일마다 함께하세요!


‘괴물 폭염’이 동남아시아를 휩쓸고 있다. 아직 본격적인 여름철이 오지도 않았는데 수은주는 한여름이 무색할 정도로 치솟고 있다. 지난해 이맘때 섭씨 32~35도를 오르내렸던 베트남, 태국, 미얀마, 라오스, 싱가포르에서는 이제 섭씨 40도 안팎의 기온도 우스운 수준이 됐다. 일부 지역에서는 체감온도가 50도를 훌쩍 넘으면서 예상치 못한 더위에 내던져진 시민들이 “지옥에서 사는 것 같다”며 신음하고 있다.

한국일보는 동남아시아 지역을 덮친 열파 현황과 무더위가 시민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심층적으로 파악해 보기 위해 현지의 기후 전문가 3명을 인터뷰했다. ①판반탄 베트남 하노이국립대 자연과학대 기후변화학과 교수 ②윗사누 아타바니치 태국 방콕 카셋사트 국립대 기후·경제학과 교수 ③싱가포르 출신 기상학자 티에용 코 세계기후연구계획(WCRP) 산하 아시아-호주몬순워킹그룹 공동의장이다. 탄 교수는 16일 연구실에서 만났고, 아타바니치 교수와 코 의장 인터뷰는 각각 화상(19일)과 서면으로 진행됐다.

이들은 “올해 그 어느때보다 뜨거운 여름이 다가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극단적인 기상현상이 가진 자와 덜 가진 자, 그리고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 불평등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내놨다. 인간의 욕심이 초래한 기후 위기가 이제는 정말 ‘실존적 위기’로 바뀌었다는 진단이다.


온난화+엘니뇨, “이상기후 더 빈번”

인터뷰에 응한 전문가 3명은 동남아시아를 덮친 때이른 폭염의 근본 원인이 기후변화에 있다고 입을 모았다. 화석연료 사용 등으로 지구 평균 기온이 높아진 상태에서 올해 3년 만에 엘니뇨 현상까지 찾아온 탓에 무더위가 더 빨리,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는 얘기다.

엘니뇨는 적도 부근 동태평양 해수면 온도가 평년보다 0.5도 이상 높은 상황이 5개월 이상 지속되는 현상이다. 당초 올해 5~7월쯤 발생할 것으로 점쳐졌으나, 해수면이 3월부터 달궈지면서 높아진 수온이 예상보다 빨리 더운 공기를 육지로 밀어 넣었다.

탄 교수는 “엘니뇨는 동남아 지역 기온을 끌어올리고 강수량을 줄여 폭염과 가뭄을 불러오는 게 특징”이라며 “온난화와 맞물리면서 올해 극단적인 기상 현상이 예년보다 빈번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기상기구(WMO) 역시 17일 “온실가스와 엘니뇨로 향후 5년간 지구 기온이 기록적 수준으로 급상승할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지난겨울 이상기온에 따른 강우량 감소까지 겹치면서 ‘봄 폭염’이 닥쳤다는 분석도 나왔다. 코 의장은 “일반적으로 건조한 토양은 습한 땅보다 더 빨리 가열된다. 겨울철 가뭄으로 대지가 마른 상태에서 날이 더워지며 고온 현상을 부추겼다”고 설명했다.

‘에어컨 유무’ 차이 아닌 생존의 문제

폭염 속에서 생활하는 것은 누구나 괴롭다. 하지만 전 세계 사람들이 모두 같은 수준의 고통을 당하는 건 아니다. 더 큰 타격을 입는 쪽은 주로 사회적 약자다. 전문가들은 “폭염, 더 나아가 기후변화의 가장 큰 문제는 불평등을 악화시킨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예컨대 기온이 올라갈수록 △뎅기열 △콜레라 △피부암 등의 발병 위험도 높아진다. 의료 접근성이 떨어지거나 상수도 인프라가 열악한 지역의 주민들이 질병에 걸릴 가능성도 덩달아 증가한다고 탄 교수는 설명했다. 지난해 5월 섭씨 50도를 웃도는 폭염이 덮친 파키스탄 피르코 지역에서 연못 물을 마신 주민 2,400여 명이 콜레라균에 감염되고, 7명이 숨진 게 단적인 사례다.

게다가 가뭄으로 세계 식량 공급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동남아 각국의 농작물 작황에 빨간불이 켜지면 식량 가격이 뛰게 된다. 이미 지난해 기록적인 식량 인플레이션(물가상승)을 겪은 터라, 먹거리를 구할 여력이 부족한 취약계층은 더욱 더 배를 곯게 될 수밖에 없다.

아타바니치 교수는 “태국 농부 대부분은 자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데, 작물 생산량이 줄면 수입도 타격을 입어 결국 가계 부채 문제로까지 이어진다”며 “이상기온이 심해질수록 빈부 불평등 간극은 점점 더 벌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폭염은 단순히 에어컨 등 냉방 장치 접근성 차원이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 문제로 봐야 한다는 의미다.

생물 다양성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코 의장은 “기온 변화는 식물 개화 시기와 곤충 수명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미친다. 생태계 기능 방해는 물론, 종(種)의 생존까지 위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구온난화 연구 분야에서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영국의 경제학자 니컬러스 스턴은 지구 기온이 섭씨 2도 오르면 전 세계 생물종 가운데 15~40%가 멸종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기금 마련, 변화의 첫걸음”

사실 동남아의 이른 폭염, 더 나아가 지구적 문제인 온난화를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할 뾰족한 방법은 없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 역시 이렇다 할 단기적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다만 동남아 기후 전문가들은 선진국이 개도국의 기후변화 피해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탄소 배출량이 상대적으로 적은 개도국이 지난 100여 년간 선진국과 부국의 산업 개발 과정에서 대량 배출된 탄소 때문에 극심한 피해를 입고 있는 만큼, 그에 합당한 보상에 나서야 한다는 취지다.

물론 선진국들이 마냥 손을 놓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지난해 11월 이집트 샤름엘셰이크에서 열린 제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에서 참가국들은 기후변화로 인한 ‘손실과 피해 보상 기금’ 마련에 합의했다. 그러나 반년이 지나도록 유의미한 진전은 없다. 기금 조성에 명시적 동의만 했을 뿐, 구체적인 액수나 지급 방식을 두고는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부국들이 기금을 마련하겠다고 강조했으나 아직은 말뿐입니다. 지금보다 더 많은 기부와 관심이 필요해요. 이것은 선진국과 개도국 간 불평등 해소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미래 세대를 위한 변화의 첫걸음이기도 합니다.”(아타바니치 교수)


하노이=글·사진 허경주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