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승1패', 삼국통일 기틀 다진 전초기지

입력
2023.05.27 11:00
19면

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31> 충북 보은 신라 삼년산성(三年山城)

신라통일의 첫 번째 관문이었다. 어쩌면 헤르만 헤세(H. Hesse)의 소설 데미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기 위해 알껍데기를 깨고 나오는 것처럼, 신라가 소백산맥이라는 껍데기를 깨고 서쪽으로 나오는 순간을 기록한 유적. 우리나라 고대의 성 가운데 축조 연도가 '신라 자비마립간 13년', 즉 470년으로 기록에 확실히 남은 유일한 성이다. 완성까지 3년이 걸렸다는 점도 사서 기록으로 남아 있다. 돌이 1,000만 개 정도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니, 아마도 이집트의 피라미드 하나는 거뜬히 지을 만한 공력이다. 시대는 달라도 삼년(三年)산성의 축조 역시 인류의 놀라운 토목사업이다. 이 특별한 산성을 본다면, 한반도의 고대 사람들이 "처절한 격변의 시대에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일찍이 사적(제235호)으로 지정됐지만 최근에야 빛을 보게 된 건, 얼마 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면서 사회적으로 새롭게 인식됐기 때문인 듯하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처한 국제질서 속에서 생존과 발전 전략의 비법을 깨우칠 수 있는 자리라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삼년산성, 보은의 동쪽

충북 보은은 깊은 내륙이지만, 경부고속국도로 남이에서 갈라지는 30번 국도를 타고 여러 터널을 지나 19번 국도로 갈아타고 북행하거나, 청주에서 25번 국도를 타고 남행하면 쉽게 다다른다. 반세기 전 무전여행을 하던 섣달 추운 날 저녁, 보은 시외버스정류장에서 법주사로 가기 위해 포플러 가로수의 비포장 국도를 총총히 바쁘게 걸을 때 소리 없이 우리를 내려다보던 무심한 산이 바로 삼년산성이 있는 오정산(烏頂山)이란다. 뒤로는 속리산 줄기가 이어지는 산지지만, 서쪽 전면으로는 보은의 넓은 벌이 훤하게 펼쳐지는 곳이다.

남동쪽의 산지를 넘어서면 문경과 상주로 바로 이어지니 고대 신라로서는 영남에서 호서지방으로 진출한 교두보 지점이 보은이고 이를 지키려 삼년산성을 쌓은 것이다. 신라로 향하는 관문이 아니라 서라벌에서 한강지역으로 가는 신라의 관문성이 되는 셈이다. 한 번도 고구려나 백제에 뺏기지 않았다.


난공불락의 성

149승 1패. 사서에 기록된 전투로 보는 놀라운 통계다. 유일한 1패도 신라 헌덕왕 14년(822년)에 김헌창의 반란군이 점령하다 관군에 패한 것이다. 반란군의 준비가 턱없이 부족했거나 내부반란이었을 것이라 의미가 없다. 성의 길이가 1,700m에 달하고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성 면적이 22만㎡를 넘어 산성 규모로는 상당히 큰 편이다. 그러나 단순한 크기 비교를 넘어 건축의 규모와 정교함은 다른 성들의 수준을 뛰어넘는다. 소지마립간 8년(486년) 부근의 굴산성(屈山城)과 함께 개축할 당시 이 지역 장정들만으론 감당하기 어려워 일선군에서 장정 3,000명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남은 걸 보면 엄청난 인력이 소요된 성이다.

산봉형 성으로서 꼭대기의 너른 평지를 둘러싸고 있고, 성돌을 가로·세로 방향으로 교대로 쌓는 우물 정(井)자형 돌쌓기로 무너짐을 최소화하고, 안팎으로 높게 쌓는 협축(挾築)으로 조성한 구간이 많다. 엄청나게 많은 돌이 가지런히 박힌 높고 매끈한 성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한다. 계곡을 막으며 쌓은 동문지의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는 20여m 높이의 성벽이 장관이다. 아득한 꼭대기에 한쪽으로 치우쳐 현문(懸門·수직벽 위 높은 출입구)을 만들었다. 평상시에는 요즘 관광객을 위한 나무 계단처럼 사다리를 놓고 오르내리지만, 전시에는 수직에 가까운 성벽만이 덩그러니 남을 뿐이다. 주출입구인 서문을 제외하면 모두 현문식이다. 발아래 보은읍이 펼쳐지는 서문지 역시 산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성벽을 구부려 배치하고 바깥 방향으로 여닫게 만들어 외부에서 공격하기 어렵게 만든다. 문(門)이나 조금이라도 적군의 접근이 용이할 수 있는 지점에는 성벽에서 돌출한 곡성(曲城)을 만들어 쉽게 방어할 수 있게 했으니 가히 철옹성이다.

이 성을 난공불락으로 만든 또 다른 요소는 마르지 않고 수량이 풍부한 5개의 천연샘이다. 후대에도 이 지역의 군창(軍倉·군수물자 비축고) 역할을 했는데, 넓은 보은벌로부터 충분한 식량을 비축할 수 있다는 점이 대규모 인력을 수용하고 적의 공격에도 장시간 견딜 수 있게 했을 것이다.


서라벌 바깥의 서라벌인가?

오늘날 경주, 서라벌은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신라의 통일과정을 이해할 때 드는 첫 번째 의문이 ‘어떻게 반도의 한쪽 구석에 있는 나라가 한반도를 통일하게 됐을까?’이다. 첫째는 국제전략, 즉 당과의 협력관계다. 둘째는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교통로 확보 및 유지 전략이다. 신라와 백제의 접경에 위치한 삼년산성에서 당나라로 배가 떠나는 항구인 화성의 당성(唐城)에 이르는 교통로에 엄청난 공력을 들여 성을 쌓았다. 이 교통로가 바로 신라의 생명선이었고 또한 통일로 가는 통로라 여겼을 것이다.

삼년산성은 예사롭지 않은 존재였다. 백제를 멸망시킨 무열왕(재위 654~661년)이 이곳에 석 달간 머물며 당나라 사신을 영접한 점은 야전행궁(野戰行宮)으로 신라의 강한 국방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했던 것은 아닐까?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의 휘하에서 활약한 도도라는 장수가 부근의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잡아 죽이는데 그가 바로 삼년산성 출신이다. 대규모의 주력부대가 이곳에 지속적으로 주둔했고, 서라벌 외부에 자리한 대표적인 군사도시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산성 일대에서 발견된 크고 작은 수천 기의 동시대 신라 고분들도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신라 산성토목기술은 어디서?

삼년산성은 신라의 성 중에서도 대단히 정교하고 웅장함을 자랑하지만 가장 이른 시기의 성이기도 한다. 5세기 후반에 세워졌으니 그 이전에는 이 같은 대규모 석성이 거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수직으로 쌓은 돌들은 압력에 약해 허물어지기 쉽고, 빗물의 영향도 우려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성의 상당 부분이 오늘날까지 잘 남아 있다는 것은 당시 고도의 건축 기술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돌을 20m 가까이 콘크리트 없이 수직으로 쌓은 것도 아마 세계에 유례가 없을 것이다.

돌 다듬을 때 면의 각도, 방향 엇갈리게 쌓기, 쐐기돌 등 미세하고 정교한 기술들이 필요하고, 압력에 밀려나지 않게 보축에 보축을 거듭해야 하고, 성내의 빗물이 성을 훼손하지 않게 수로와 수구(水口)를 구축해야 한다. 당시로서는 최고의 토목기술들을 이 산성에서 볼 수 있다. 화성 당성의 기와에 남은 명문에서 보듯 신라는 성을 쌓는 핵심 기술자들을 모두 서라벌에서 파견했다. 신라의 산성축조기술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한반도에서 성의 존재가 알려진 시기는 위만조선(기원전 2세기) 때다. 사기(史記) 조선열전에 보면 위만조선이 기원전 108년 한 무제의 공격에 일 년이나 저항할 수 있던 이유로 견고한 왕검성(王儉城)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고구려도 초기 수도인 졸본성을 호위하는 성인 오녀산성의 존재에서 웅장한 석축성을 건설했음이 보인다. 4세기 후반 고구려의 불교가 신라로 넘어오고, 신라의 실성왕자가 고구려에 볼모로 있다 왕이 되기도 하고, 400년 왜와 가야를 함께 공격했다는 광개토대왕비 명문 등에서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교류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석성축조를 위해 발달된 토목기술이 전수된 것은 아닐까? 이 성이 축조되는 5세기 후반까지 신라와 고구려가 호형호제, 그리고 티격태격하면서 교제하였음을 본다. 기록은 없지만 그럴 개연성은 충분할 것이다.

작지만 강한 나라를 만드는 비법이 담긴 곳

가야, 백제, 고구려 그리고 왜구의 끊임없는 괴롭힘을 물리치기 위해 외교적 곡예를 하던 신라가 무모하지만 원대한 꿈을 실현하려 치밀한 전략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삼년산성은 그 첫 관문이었을 것이다. 서문 쪽 널찍한 아미지(蛾眉池) 연못 방향의 성내에는 무심한 노란 들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만이 남았지만, 수없이 다녀 문지방석에 수레바퀴 자국이 선명한 성문을 걸어 나오며 드는 생각, 삼년산성을 쌓았던 신라인의 원대하고도 끈질긴 통일전략이야말로 격랑의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아닐까?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