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60대에도, 70대에도, 80대에도 밖에 나가 모험에 나서는데 왜 여자들만 집에 머물러야 하나요.”
21일 오후(현지시간) 프랑스 칸의 한 호텔에서 마주한 배우 량쯔충(61·楊紫瓊)은 유쾌하고 거침없었다. 말 하나하나가 명언이라 할 정도로 재치 넘치면서도 의미심장했다. 대담 행사 ‘위민 인 모션(Women in Motion)’에서였다. ‘위민 인 모션’은 프랑스 명품패션그룹 케어링이 매년 칸국제영화제 기간 주최하는 행사로 유명 여성 영화인들의 삶과 영화계에 대한 생각을 듣는 자리다. 이날 행사에는 한국일보를 포함해 국내 매체 2곳 등 전 세계 50여 개 매체만이 초대됐다.
량쯔충은 지난 3월 12일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미국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을 아시아계 최초로 받았다. 량쯔충은 이날 아시아와 여성을 주요 소재로 이야기를 나눴다. 칸영화제에 대한 추억부터가 아시아 영화에 대한 편견에 관한 얘기였다. 량쯔충은 “23년 전 ‘와호장룡’으로 칸영화제를 찾았다”며 “당시 상영 중 기립박수를 받는, 감격적인 순간을 경험했다”고 떠올렸다. 그는 “하지만 미국인 아무도 ‘와호장룡’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며 “미국 관객은 자막 있는 영화를 안 본다는 이유에서였다”고 당시 상황을 돌아봤다. 그는 “‘와호장룡’은 결국 많은 관객(비영어 영화 역대 최고 흥행)을 모았고 아카데미상 작품상과 감독상 등 후보(10개 부문)에 올랐다”며 “자막이 무슨 문제냐”고 반문했다.
‘와호장룡’에 대한 추억은 아시아계 배우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량쯔충은 “중국과 대만 등에서 아주 좋은 영화들이 쏟아져 아카데미상과 여러 영화제 주요 후보에 오르거나 상을 받았는데 배우들은 늘 외면받고는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배우 없이 어떻게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느냐”며 여전히 서구 배우만을 중시하는 할리우드 풍토를 꼬집었다.
하지만 량쯔충은 40년 배우 활동을 하면서 느낀 가장 큰 변화로 “할리우드의 다양성”을 꼽았다. 그는 “영화 ‘기생충’ 등이 성공하면서 아시아계 배우 약진에 도움을 줬다”면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2018)이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고 평가했다. 량쯔충은 “주요 등장인물 대부분이 아시아계이면 흥행할 수 없다는 할리우드의 편견을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 깼다”며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2021)도 (아시아계 배우들에게) 큰 문을 열었다”고 덧붙였다. 그에게 주연상을 안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키 호이 콴과 스테파니 수를 비롯해 배우 대부분이 아시아계다. 량쯔충은 “요즘 내게 일어나고 있는 최고의 일은 중국인이나 아시아인으로 등장인물을 묘사하는 각본을 더 이상 받지 않는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제작 당시 에피소드와 수상 당시의 심정을 떠올리기도 했다. 량쯔충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2년가량을 쏟아부었다”며 “SXSW(미국 대중문화축제)에서 편집감독의 아내를 만났는데, 자기 대신 남편과 함께 산 사람이라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아카데미상 경쟁에 뛰어들었을 때는 “수상은커녕 후보에 오르는 것조차 생각지도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영국 등에서 촬영하면서 미국에서 열리는 온갖 파티와 행사에 꼬박꼬박 참여하며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도 했다. 량쯔충은 오스카를 수상했을 때 “세계의 구석에서 흘러나온 기쁨의 포효를 들었다”며 “저의 수상으로 저보다 다른 (아시아계) 배우들이 좋은 대우를 받고 좋은 역할을 맡을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량쯔충은 수상 소감으로 화제가 된 “여자들이여 전성기가 지났다고 말하지 마라”가 지닌 의미를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저 또한 나이가 들면서 역할이 줄어 좌절감을 느꼈다”며 “왜 우리는 (나이 들어도 밖에서 일을 하는) 남자들처럼 할 수 없느냐, 우리들의 기회를 갖기 위해 싸워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남성 중심 영화계의 이중잣대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량쯔충은 “남성들은 심각한 손실을 입은 대형 영화들에 참여해도 똑같은 일을 계속할 수 있다”고 남성 배우, 남성 감독에게만 여러 번 기회가 주어지는 현실을 통박했다. 한편 그는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제작비가 높고 폭력적이며 컴퓨터그래픽(CG)이 많으면 영화가 좋아진다는 안이한 생각을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날 행사 취재진의 대다수가 여기자들이었다. 량쯔충이 대담을 마치고 떠날 때 환호와 박수가 뒤따랐다. “목소리를 높여라(Speak up)”는 량쯔충의 열변에 대한 공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