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21일 히로시마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한국인 위령비)에 동반 참배했다. 한일 정상이 동시에 한국인 위령비를 찾은 것은 처음이다. 이어진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동반 참배를 "용기 있는 행동", "양국 관계 및 세계 평화에 중요하다"고 한껏 의미를 부여했다.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 간 정상회담은 2주 만에 열린 것으로, 양국 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했다.
윤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는 이날 오전 7시 35분쯤 히로시마 평화공원 내 한국인 위령비를 찾았다.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기시다 총리와 유코 여사가 윤 대통령 부부를 맞이했다. 두 정상 내외는 나란히 위령비 앞으로 걸어가 헌화한 뒤 10초간 묵념했다. 이어 위령비를 찾은 박남주 전 한국원폭피해자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 등 원폭 피해자 10명을 향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는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등에 의해 히로시마에 왔다가 1945년 미군의 원폭 투하로 희생된 한국인 2만여 명을 기리는 비석이다. 1970년 4월 민단 히로시마 본부가 주도해 평화공원 건너편에 비석을 세웠고, 1999년에야 현재 위치인 공원 안으로 옮겨졌다. 한일 정상이 함께 이곳을 찾은 것은 위령비가 세워진 이후 53년 만에 처음이다. 한국 대통령의 참배는 이번 윤 대통령이 처음이고, 일본 총리 중에는 1999년 오부치 게이조 당시 총리가 참배했다.
이도운 대통령실 대변인은 양국 정상의 동반 참배에 대해 "가슴 아픈 과거를 직시하고 함께 치유하자는 두 정상의 의지"라며 "동북아와 나아가 국제사회의 핵 위협에 두 나라가 공동으로 대응하겠다는 의미도 포함됐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이번 참배가 과거사에 대한 일본 정부의 진전된 입장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그간 한일 양국이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말 위주로 해왔다면 이번에는 실천한 것"이라며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고 했다.
이어진 한일 정상회담은 약 35분간 이어졌다. 지난 8일에 이어 2주 만이자, 지난 3월 윤 대통령의 방일 이후 두 달여 만에 세 번째 열렸다. 이 자리에서 두 정상은 양국 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했고, 북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공동 대응과 한미일 공조 강화에 대해서도 뜻을 같이했다.
공개 발언에선 두 정상은 위령비 동반 참배의 의미를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우리가 함께 참배한 것은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 대해 추모의 뜻을 전함과 동시에, 평화로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기시다 총리님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8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총리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해 개인적 의견을 전제로 '마음이 아프다'고 말한 것을 거론하며 "한국 국민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며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신 총리님의 용기와 결단이 매우 소중한 것이라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기시다 총리도 "(두 정상의 동반 참배는) 한일 양국 관계와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2주 만에 열린 이번 회담에 대해선 "우리 정상 사이에서나 일한관계에도 진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두 정상 간 활발한 소통을 부각했다.
이도운 대변인은 회담 후 서면 브리핑을 통해 "양 정상은 외교안보 분야는 물론 경제, 산업, 과학기술, 문화예술, 인적 교류 등 제반 분야에서 양국 관계가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앞으로도 긴밀하게 협력하며 구체적인 성과를 만들어 나가자고 했다"고 전했다. 이어 "G7 정상회의를 계기로 양국 간 글로벌 어젠다에 관한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로 했고, 북한 핵과 미사일 위협이 고조되는 지역 정세 하에서 한미일 간 긴밀한 공조를 더욱 굳건히 해나가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고 밝혔다. 특히 윤 대통령은 한일관계와 관련해 △한국-히로시마 포함한 양국 직항로의 재개 △'한일 미래 파트너십 기금' 원활한 운영 △공급망과 첨단기술 협력 진전을 언급했다고 이 대변인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