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에서 ‘금기 중의 금기’로 꼽히는 군주제 개혁이 민주정부 구성의 뇌관으로 떠올랐다. 2014년 쿠데타로 시작된 군부 시대를 끝내려면 14일 실시된 총선에서 하원 제1당이 된 전진당을 중심으로 연립정부를 구성해야 한다. 그러나 키를 쥔 제3당이 전진당의 왕실모독죄 폐지 공약을 이유로 연정 참여에 선을 그으면서 정권교체에 빨간불이 켜졌다.
18일 태국 방콕포스트에 따르면, 총선에서 의석 70석을 얻은 품차이타이당은 “형법 112조(왕실모독죄)를 개정하거나 폐지하려는 정당과는 정부를 구성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태국은 전 세계 43개 군주국 가운데 왕실모독죄를 가장 엄격하게 처벌한다. 왕과 왕비 등 왕실 구성원을 모독하거나 왕가 업적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면 최고 징역 15년에 처한다. 전진당은 왕실모독죄 폐지를 최우선 공약으로 내세우며 군주제에 비판적인 유권자들의 표심을 끌어 모았다.
전진당이 새 총리를 세워 정권을 탈환하려면 상·하원 전체 750석(군부가 임명한 상원 250석 + 선거로 뽑는 하원 500석)의 과반인 376석을 확보해야 한다. 총선에서 152석을 얻은 전진당은 이날까지 친탁신계 푸어타이당(141석), 6개 군소정당(총 20석)과 연정을 이루기로 했다. 313석을 만들었지만 63석이 부족하다. 품차이타이당과의 연대 없이는 군부를 몰아낼 수 없다는 얘기다. 중도를 표방하는 품차이타이당은 쁘라윳 짠오차 총리가 이끄는 군부와 연정을 이루고 있어서 왕실모독죄가 연정에 불참하기 위한 표면적 명분일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전진당은 추가 지지표를 얻기 위해 상원 문까지 두드렸다. 차이타와트 툴라톤 전진당 사무총장은 “정치적 교착상태를 지양하는 성숙한 상원의원도 있다고 확신한다”며 “그들을 만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원의원들은 현지 언론에 "왕실모독죄를 지켜야 한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연정 내에서 잡음이 일 조짐도 있다. 탁신 친나왓 전 총리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클럽하우스에서 “나는 왕실에 충성을 맹세했으며, 푸어타이당은 군주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전진당의 어떤 행동도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탁신이 당의 ‘정신적 지주’인 점을 감안하면, 당내에서 이탈 세력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전진당이 1호 공약을 후퇴시키기는 쉽지 않다. 전진당은 ‘의회가 열리면 제출할 45개 법안’ 목록을 공개했는데, 징병제 폐지, 동성혼 허용과 함께 왕실모독죄 폐지가 담겼다.
왕실모독죄 폐지 논란이 사회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푼차다 시리분나부드 방콕 마히돌대 부교수는 “전진당이 총리 선출 기한(7월 말~8월 초)까지 연정을 꾸리지 못하면 정당 해산이나 군부 쿠데타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 상황을 전진당에 표를 몰아준 청년 유권자들이 두고 볼 리 없다. AFP통신은 “군부가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변화를 열망했던 많은 시민들이 (시위를 위해) 거리로 뛰쳐나오면서 태국은 또 다른 위기에 빠질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