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보든 보지 않든,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날씨에 상관 없이 현장에서 묵묵히 삽질과 호미질을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 이 일이 땅으로부터 보물을 캐는 일이 아니라 유적과 유물이라는 과거 일상을 발견하는 작업이라는 것을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20년간 현장에서 호미질을 한 김선(49)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관이 말하는 고고학은 그런 직업이다. 진품명품에 나올 법한 수억원 짜리 보물을 파내는 일이 아니다. 인디아나 존스나 툼레이더처럼 모험에 나서는 일도 없다. 대신 문화재청 관리 아래에서, 종일 땀과 콧물을 흘리며, 호미질, 삽질, 괭이질을 한다.
그 심심한 일상을 소개한 에세이인데, 재미있다. 낭만적 에피소드가 가득하다. 가령 저자는 서울 종로 공평동 유적 발굴 현장에서 다량의 소 뼈를 발견하고 흥분한다. 조선시대 사대문 안에서는 도축이 금지됐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몰래 소고기를 날름 먹고 뼈를 매장한걸까. 이런 일이 흔했을까, 어떤 부위를 먹은 걸까, 한우는 언제부터 인기가 있던 걸까. “고고학을 하는 우리는 토층이 품고 있다가 내 놓는 이런 비밀스런 물건들 앞에서 흥분한다. 역사의 기록들에 반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그냥 덮어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유구(遺構ㆍ잔존물)가 된다.”
대가를 바라지 않은 호기심, 작은 단서에 대한 큰 관심이 놀라운 발견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고고학의 진짜 낭만이다. 세계 고고학계를 발칵 뒤집은 경기 연천 전곡리 유적 발견 사례가 그렇다. 1977년 동두천 주한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던 그레그 보웬은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즐기다가 우연히 짱돌을 줍는다. 고고학과 학생이던 그는 심상치 않은 돌임을 직감하고, 세계적 구석기 전문가 프랑수와 보르도 교수에 사진을 보낸다. 보르도 교수는 서울대 고고학과로 연락하고 곧이어 대대적 발굴이 실시된다. 무려 30만 년 전 구석기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유럽ㆍ아프리카에 국한된 구석기 문명 지도를 동아시아까지 넓힌 '세기의 발견'이었다.
저자는 북한산 서암사지, 남원 실상사, 단양 용부원리사지, 경희궁지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적지의 발굴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 놓는다. 흙먼지를 뒤집어 쓰며 호미질을 하다가 “공부 못하면 저렇게 된다”는 말을 들었던 경험, 흑산도 무심사지 발굴에서 친해진 네분의 여성 인부인 ‘핑클 어머님들’과 동고동락한 추억 등 인간미 물씬 풍기는 얘기들도 이어진다. 약탈문화재의 주인은 누구인가, 여성 고고학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등 묵직한 주제에 대한 고민도 담았다. 앞으로 문화재를 보면 작은 발견에 흥분했을 고고학자들이 떠오를 것만 같다.